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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주 Mar 25. 2022

큰 강아지지만 해치지 않아요

해리와 나 15


휴일 오전, 해리와  근처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다녀왔다.  시간 남짓이면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올  있는 나지막한 산인 데다가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풍경이 좋아서 종종 찾는 곳이다. 그사이 기온이 많이 올라 겨우내 앙상하던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푸릇푸릇한 봄기운과 맑은 바람을 듬뿍 맞고 하산하는 길에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른 둘과 어린이 , 그리고 새하얀 강아지  마리가 함께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맞닥뜨린 곳이 좁고 가파른 경사로이다. 그 가족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일찍부터 해리의 산책 줄을 짧게 잡고  한편으로 비켜섰다.  아이가 가장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는 “강아지다.” 하고 외쳤다.  소리에 해리도 그들을 처다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다. 남자 어른이 얼른 강아지를 안고 작은 아이의 손을 았다.

아이는 자기 몸만  강아지가 무서운지 엉덩이를 뒤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걸음으로 지나간다. 그러며 “ 강아지 무서워.” 하고 말한다. ‘그래, 커다란 강아지가 낯설고 무서울 수도 있지.’ 나는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이미  기다리고 있는 해리에게 “해리, 기다려!” 다시 한번 단속을 했다. 그러자 손을 잡고 가던 어른이 달래듯이 “괜찮. 리트리버는 착한 .” 하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해리와 나는 별일 없이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 짧은 만남이었는데 웬일인지 아이와 어른이 던진 짧은 말들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람들은 무언가 낯선 것을 마주쳤을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틀에 맞추어  대상을 인식한다. 이것은  앞에 나타난 대상 혹은 사건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로 인해 벌어질지도 모를 위협에 대비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이다. 그런데 가끔은  사고틀이 나의 인식을 제한하여  앞에 나타난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때 작용하는 사고틀을 우리는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이라고 부른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겪으며 자신의 사고방식을 돌아보고 이를 수정한다.

그날 마주친 아이는 커다란 물체는 위협적이라는 이미지를 근거로  강아지인 해리를 무섭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른은 골든 리트리버는 천사견이라는 이미지를 근거로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 이런 생각은 일종의 선입견이지만 (그렇지만 큰 강아지라고 모두 위협적인 것은 아니고 리트리버라고 해서 모두 순하라는 법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문제는 아니다.  강아지가 무섭다는 아이의 말은 자연스럽고 솔직한 반응이라고 느껴졌다.


문제는 자신의 선입견이 틀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생겨난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굳어지면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이 되고  나아가면 누군가를 차별하는 근거가 된다.  강아지가 위협적일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강아지가 가까이 다가가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볼썽사납다는 눈빛을 하고 지나가거나 “입마개를 해라”, “ 밖으로 개를 데리고 나오지 마라등등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안타깝게도 해리와 함께  밖을 나서면 이런 편견 어린 시선과 차별적인 대접을 받을 때가 많다.

우리가 산책길에 마주치는 편견들 중에서 가장 즉각적이면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강아지는 사람을 해치기 쉽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은  강아지는 기질적으로 사나워서 위협적인 행동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함께 다니는 반려인인 ,  젊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함께 작용해서  강아지의 공격성은 통제되기 어렵다고 추측하는 모양이다.) 이들은 대부분 언론에서 보도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물림 사건을 근거로 들며  개가 사람들을 무는 일이 많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철석같이 믿어야 하는 진리인 걸까. 그것은 아니다. 대형견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항변을 하자면 이런 보도들은 일부의 치명적인 사례를 마치 보편적인 것 마냥 착각하게 만들도록 편집된 것 같다.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그저 “큰 개가 사람을 물었다”라는 것만 부각해 자극적인 방식으로 보도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행태는 편견을 조장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편견에 합치되는 보도는 기존의 편견을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더 깊이, 더 오래 기억된다.


강아지의 크기와 공격성이 비례한다 명확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소형견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는 연구 결과를 확인할  있었다. 이런 경향은 강아지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알면 이해하기 쉬운데 특수한 목적으로 훈련된 개체 혹은 과도하게 공격성이 높은 일부 개체를 재외한 보통의 개들은 상대방을 해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왜소하고 취약한 소형견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적인 행동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공격성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선입견이라고   있다.

강아지의 공격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크기나 품종은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강아지의 공격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변수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강아지가 어떤 환경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며 어떤 반려인과 생활하느냐 하는 것들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필요한 매너와 행동 방식에 대해 교육받지 못하거나 과도한 보호 혹은 방임 속에서 자란 강아지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공격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쯤 되니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대형견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큰 강아지가 공격적인 성향을 띄면 통제하기 어렵고 피해가 큰 것 또한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큰 강아지라고 해서 무조건 공격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큰 강아지와 그의 반려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강아지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편견의 말들을 마주칠 때면 이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없이 위축이 되기도 한다. 이꼴 저꼴 보기 싫어 산책을 나가기 싫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큰 강아지지만 해치지 않는다고 이렇게 글을 쓴다. 부디 커다랗지만 무해한 강아지와 그의 반려인이 괜한 긴장감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장소나 적은 시간을 찾게 되는 날이 줄어들기를, 그날 산에서 우리를 만난 아이도 멈춰 섰다 스쳐 지나간  찰나의 순간이  강아지라고  무서운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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