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18
“아니, 동네 길에 왜 개를 데리고 다니고 지랄이야!”
우리 동네에는 동물 혐오주의자가 산다. 60~70대 노인인데 산책길에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건다. 처음에는 동네 어르신이라고 인사를 했는데 몇 번 시비가 걸리고 참다 참다 나도 대거리를 한 이후로는 그 노인을 마주쳤던 시간을 피해 산책을 다녔다. 그렇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한쪽에서 피한다고 영영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수 없는 날에는 이렇게 꼭 한 번씩 마주친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그 노인은 어김없이 소리를 친다.
“개가 좋으면 집구석에서나 키우지 동네 시끄럽게 왜 데리고 다니냐!”
처음에는 그 노인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똥을 치우지 않거나 목줄을 하지 않은 채로 산책을 하는 매너 없는 보호자들도 많고, 큰 개가 통제 없이 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는 거라고. 그래서 상냥한 얼굴로 항상 목줄을 하고 있고 사람들이 지나갈 때 가까이 가지 않도록 목줄을 짧게 잡는다고 해명을 했다. 그렇지만 노인은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소리를 쳤다. 노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자 해리가 불안해했다. 한마디 더 하려다가 해리 모습을 보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심정으로 대구 없이 피해 갔다.
다음번 마주쳤을 때에도 노인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이번에는 개 때문에 자기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똥도 아무 데나 싸고 밭에 들어가서 작물도 망가뜨리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닌다고 했다. 남의 밭에 못 들어가게 줄을 잡고 있고 똥은 배변봉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치우고 있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털이 날린단다. 하… 야외에 털을 떨어뜨리는 것까지 문제를 삼는다니. 이 정도면 피해망상 아닌가. 그때 깨달았다. 이 노인이 개를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구나. 이유가 없으니 설득할 방도도 없다. 그냥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앗, 해리 미안ㅠ) 해리 목줄을 짧게 잡고 지나갔다.
다른 날 또다시 다시 마주쳤을 때, 이번에도 멀리서부터 큰소리가 들렸다. 그냥 되돌아가려니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내지른다. 나도 화가 나서 다시 돌아섰다. 이제까지는 내가 흥분하면 해리도 흥분할까 봐 참고 있었는데 그때는 참을 수가 없었다. 똥도 치우고 목줄도 하고 다니는데 왜 그러냐고 소리를 치며 대구를 했더니 아주 막무가내로 혐오발언을 쏟아낸다. 역시나 내용은 없고 그냥 개를 데리고 다니는 게 못 마땅하다는 것이다. 나도 같이 큰소리를 내고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노인이 원래 성질이 고약하다며 자기 집에 와서도 내가 개 키우는 걸로 문제를 삼아서 남에게 피해 안 끼치게 키운다는데 왜 그러느냐 타일렀다고 한다. 원래 말이 안 통하고 동네에서도 문제적 인물이니 마주치면 그냥 적당히 무시하라고 했다. 괜히 울컥해서 아주머니를 붙잡고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토로할까 싶었지만 그들은 미우나 고우나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이웃으로 지내던 사이니까 괜한 말을 했다가는 또 어떠한 말이 오고 갈지 몰라 참았다. 나는 이 마을에 산 지 2년이 되지 않은 신입이고, 젊은 여성이기에 이래저래 동네의 최약자이다.
그다음부터는 그 노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사는 집, 부치는 밭 그리고 그 사이 난 길 쪽으로는 발길을 끊었고 마을 안길보다는 되도록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해안산책로로 산책을 갔다. 가끔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피해 다녀야 하나 자괴감도 들었지만 되도록이면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고 해리를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해리가 안전하게 산책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노인을 마주칠 일이 줄어들자 험한 말을 듣거나 시비를 붙을 일도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불안감이나 긴장감이 줄었지만 한편으로는 잘하고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맞서지 않고 눈앞의 화를 면하고자 피해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사실 해리와 산책을 나가면 꼭 그 노인이 아니더라도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더러 있다. 왜 개를 공공장소인 공원에 데려오느냐, 젊은 여자가 왜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느냐, 큰 개 무섭다, 똥도 아무 데나 싸고 지저분하다, 개가 사람을 해치면 어떻게 하느냐 등등. 그들은 우리가 딱히 큰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아주 큰 불편이나 피해를 가져온 것처럼 문제를 삼는다. 명확한 이유 없이 특정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이런 감정의 이름은 혐오이다. 사람들의 혐오가 향하는 대상은 큰 강아지인 해리일 때도 있고, 해리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여성인 나일 때도 있고, 우리 모두일 때도 있다. 실제로 여성이 대형견을 데리고 나가면 남성보다 시비에 휘말릴 확률이 훨씬 높다. 공원에서, 골목에서 이런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에게 욕을 듣거나 위협을 당하면 너무나 불쾌하고 화가 난다. 그리고 그 감정이 가라앉으면 우리는 공공에 속하지 못하는 이상한 존재인가 하는 소외감이 밀려든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 크고 귀여운 댕댕이를 미워할 수 있을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혐오가 그들이 오해하고 있어서, 이 강아지에 대해 잘 몰라서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조심히,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산책을 했다. 배변 봉투는 눈에 보이게 들고 다녔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일찍부터 비켜서고 줄을 짧게 잡았다. 또 해리가 사람에게 짖거나 가까이 다가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산책 예절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 강아지가 무해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그들의 혐오가 잦아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피혐오 경험이 많아지자 그런다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 모두가 내 강아지를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귀여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성숙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몰랐는데 세상에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개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개에 대해서 관심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 강아지를 (동물을,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설득할 수 없다. 혐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그들의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그들이 들이미는 논리, 어떤 대상이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실제가 아니라 상상 속의 이미지일 뿐이다. 현상이 혐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현상을 왜곡시킨다. 왜곡된 세상 속에 편향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애써서 증명하려 노력하던 것을 멈추고 상식 수준에서 행동하기로 했다.
대문을 나설 때 괜히 위축되던 마음도 다잡기로 했다. 백번 양보해서 혐오는 자유일 수 있다. 사람들의 경험과 믿음은 다양하고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니까. 그렇지만 자신의 혐오를 행동이나 말로 드러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다. 그들이 자신의 편향된 감정과 생각을 근거로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존재를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노인의 행동이 혐오라고 이름 붙이자 내 마음도 좀 더 분명해졌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피하거나 참기만 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참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복이 아니라 똥이다. 그리고 똥이 더럽든 무섭든 피하는 게 상책은 아니다. 똥은 치워야 한다. (배변봉투도 있지 않은가.) 노인은 앞으로도 혐오발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산책을 멈출 수는 없으니 어떨 때는 꿈틀 하고 어떨 때는 무시하고 어떨대는 대거리를 하면서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혐오이고 그렇게 씨꺼먼 속을 다 꺼내 보이는 행동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