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11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한적한 시간을 골라 산책을 하기 힘들다.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기에 언제든 동네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다. 물이 나는 시간에 바지락을 캐러 갯벌로 나가는 사람들, 때가 되어 밭을 돌보러 가는 사람들, 그것도 아니면 볕 좋은 날에는 골목 입구에 의자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이라도 만난다. 아직 낯선 사람들이라 기척이 들리면 우선 해리의 산책 줄을 짧게 고쳐 잡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다정한 말이 들려온다.
“개 운동하러 가나?”
골목 위에 사는 아주머니다.
“네~. 안녕하세요!”
“날마다 데리고 다니는 게 보통일이 아닌데 걸리느라 욕본다(산책시키느라 수고한다).”
“맨날 하는 일인데요, 뭘.”
말은 그렇게 해도 칭찬을 들으니 괜히 우쭐한다.
우리가 이 동네로 들어온 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우리 마을은 백 가구 남짓 살아가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아파트로 치면 한 동보다 적은 사람들이 바닷가 옆 언덕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다. 큰 도로에서 한참을 더 들어와야 하고 시와 시의 경계에 있는 외떨어진 동네이다. 편의점이나 식당 같은 편의시설은 물론이고 인근 바닷가에 흔히 있는 굴 공장 같은 수산가공업체도 하나 없는 한적한 곳이다.
나는 이런 점이 좋아서 이 마을로 들어왔지만 외딴 마을에 웬 젊은 처자가 집을 짓고 살겠다고 하니 마을에서는 작은 소란 거리로 회자가 된 모양이다. 집을 지을 때부터 구경을 한다며 동네 분들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어느 날은 “남편은 어디 가고 혼자만 자꾸 오느냐?”는 질문에 “결혼 안 하고 혼자 삽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다음 날 마주친 동네 어르신이 대뜸 “왜 결혼을 안 하느냐?”, “왜 혼자 사느냐?”는 말을 인사로 건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초면에 이런 것을 묻다니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이곳은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곳인 듯했다.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또 때가 되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건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말이다. 그런 세계에 큰 강아지를 데리고 혼자 사는 별난 사람이 제 발로 찾아들어 왔으니 퍽 이상한 인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듯했다.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도 전에 나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와 함께 앞으로 이 사람들과 어떻게 잘 지내야 하나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오고 나니 걱정과는 다르게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을 지을 때 여러 사람들이 예고 없이 방문하여 요청하지도 않은 조언과 잔소리를 했던 터라 이사 후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큰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그것도 집안에 함께 지낸다니 함부로 현관문을 두드리기 꺼려질 수 있겠다 싶었다. 해리로 인해 일종의 안전지대가 생긴 셈이니 역시 해리와 함께 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허물 없이 지내는 것이 싫다.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존재해야 하며 그래야 더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내 공간에 함부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싫고, 살가운 성격도 못 되는 나라고 해서 이웃과 영영 담을 쌓고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날마다 해리를 데리고 동네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골목에서,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가끔은 마을살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를 불편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를 힐끔 보고 숨어 버리는 사람, 인사를 해도 모르는 체하는 사람, 왜 큰 개를 데리고 다니냐고 호통을 치는 사람, 입마개를 하라고 훈수를 두는 사람 등등 각양각색의 반응으로 낯선 우리를 경계하는 듯했다. 내가 집을 짓고 이사를 온 것이 마을에 피해가 되거나 해리가 공격적인 행동을 하거나 위협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반응을 접하니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분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위축되었다. 그럴 때면 아예 동네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렇지만 좋은 동네 길을 놔두고 휘발유를 태워가며 원정 산책을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그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산책을 다녔다. 최대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또 이 강아지는 덩치만 컸지 위협이 못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걸었다.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멀리서부터 해리를 멈춰 세우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낯선 곳이라 긴장한 데다가 누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책을 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위협은 상대적인 것이고 마을에서 강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본 매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해리를 잡고 있는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생겼다. “개가 주인 잘 만났다.” 하는 관심의 말이나 “아침저녁으로 개 운동시키는 게 보통이 아니다.” 하는 칭찬의 말들도 듣게 되었다. 얼굴을 보고 말을 섞는 시간이 쌓이자 조금씩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들고 우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한 아주머니에게 “큰 개가 줄도 안 땡키고 잘 가네” 하는 칭찬도 들었다. 해리가 줄을 당기는 버릇이 다시 생겨 교육을 하면서 산책을 하던 터라 요즘 산책길이 참 고됐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듣고 싶은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마음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하고 답하고 잠시 동안 함께 걸었다. 멀리서부터 우리를 알아보고 "해리야~ 산책 가나?" 이름을 먼저 불러주는 이웃들도 생겼고 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시는 아주머니와 딸도 강아지를 키워서 명절 때마다 본다는 할머니와는 강아지에 대한 조금은 긴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해리의 존재가 마을 사람들과 나 사이에 있는 벽을 더 높고 공고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오히려 그 벽을 넘나드는 데 해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금 해리와 함께 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해리는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 애살있게 구는 강아지는 아니라서 동네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어도,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들은 척만 척, 본척만척이다. 그저 코를 박고 냄새 맡는 것에 집중을 하고 있다. 이 녀석이 사람들을 보고 반가워하고 인사도 하면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데 도음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것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처자와 그의 송아지만 한 강아지로 마을에 스며들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마음이 흐뭇해 지고 마을로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