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26
해리와 함께 산책을 하다 보면 가끔씩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혹시나 지적을 받거나 시비에 걸리지 않을까 긴장하며 산책을 하다가 관심을 가지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풀린다.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해리의 이름을 묻거나 자기 집에도 강아지가 있다며 “친구 냄새나지?” 하며 손을 내민다. 그런데 이렇게 따스한 말을 나누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꼭 풀어진 마음을 다시 얼어붙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무리는 다짜고짜 호구조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보통 나이이다. 정말 대뜸 “몇 살이에요?”하고 묻는다.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좋은 마음으로 “여섯 살이에요.” 대답을 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어이구, 나이가 많네. 그래 보이더라.”, “사람으로 치면 이제 노인이네.”와 같이 듣는 입장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해리가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며 안타까워하는 입장에서 그런 말들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오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다음으로 많이 묻는 것은 성별이다. “암컷이죠?”, “암놈입니까? 수놈입니까?” 하고 묻는다. “암컷이에요” 대답하면 새끼를 낳은 적이 있는지 묻는 경우가 더러 있다. 중성화 수술했다고 말하면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될 텐데 “아니, 왜 새끼 한번 못 낳아보게 수술을 했냐?”라고 안타까워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 꼭 있다. 새끼를 낳는다고 자기가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새끼를 낳아 봐야 인생, 아니 견생의 과업을 이루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중성화 수술에 대해서는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의견이 갈려서 나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출산과 육아에서 해방된다는 것 외에 자궁에 생기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부수적인 장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빈대 잡으려고 집을 불태우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강아지의 수명은 짧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강아지가 큰 병에 걸리면 인간이 같은 병에 걸렸을 때보다 예후가 좋지 않으니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앤젤리나 졸리도 높은 확률로 걸릴 가능성이 있는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유방을 절제한 바 있지 않나.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호구조사를 하여 서열을 잡는 것이 정이라고 통칭되던 과거를 청산하고 낯선 사람에게 나이나 성별, 결혼 여부를 묻는 것이 실례일 수 있다는 것이 기본상식으로 자리 잡은 새 시대에 살고 있다. 부디 남의 이러한 오지랖에 기분이 상하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의 견생의 중대사를 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점을 헤아려 거리감 없는 질문은 삼갔으면 좋겠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앉아”나 “손” 같은 것을 시켜본다. “저희 개는 그런 거 못 해요” 하면 대부분 무안해하며 스쳐 지나가지만 가끔씩 “아니, 똑똑한 강아지인데 왜 교육을 안 시키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글쎄요. 그런 게 왜 필요하지요?” 하고 되묻고 싶지만 길게 말하기 싫어서 그냥 웃고 만다.
나는 강아지에게 최소한의 것만 교육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낯선 환경에서도 흥분하거나 불안하지 않도록 “앉아”와 “엎드려”라는 말에 따를 줄 알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거나 잠시 혼자 남겨질 순간에 대비하기 위한 “기다려” 정도만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손”, “충성”, “빵야” 같은 명령에 대한 복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강아지의 교육 수준은 반려견의 성향, 능력치, 반려견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하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많은 명령어를 알아듣고 더 많은 명령에 따른다고 해서 더 좋고 훌륭한 것, 반려인과 반려견이 더 많은 교감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필요한 명령에 복종하는 강아지를 보고 인간이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 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설령 해리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낯선 사람이 그것도 맨입으로 하는 명령어에 반응할 필요가 있을까?
비슷한 맥락에서 나와 해리가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강아지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것 아니냐”며 참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하는데 사람대접하며 키운다는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인간과 강아지 사이에는 수직적인 위계가 있고,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며 이런 위계가 무너진다면 큰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강아지는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지닌 존재이고 생명에는 위계가 없다. 강아지보다 인간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해리를 사람처럼 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강아지답게 대한다는 것은 강아지의 습성과 특성에 맞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강아지를 낮게 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평등한 관계, 그것이 종이 다른 우리 사이의 기본이기를 바라본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글을 이어왔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로 통한다. 바로 세상에 각양각색의 인간과 강아지가 있듯이 그들 사이에도 다양한 반려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내 맘 같지 않고 내 뜻 같지 않더라도 자신의 존재와 형편과 경험에 맞는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 관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낯선 사이라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달라는 당부도 하고 싶다. 처음 만난 사이 혹은 아직 친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이 불쑥 다가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가. 강아지도 같다. 더구나 함부로 만지거나 거리감 없는 질문을 하거나 참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반가운 마음, 알고 싶은 마음은 고맙지만 당장 표현하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거리를 지키며 과하지 않게 표현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멋지게 마주치는 순간이 쌓이면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