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25
가끔 해리가 한없이 부러워질 때가 있다. 매일 걷는 길을 처음 걷는 것 마냥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걸을 때, 일상의 작은 기쁨에도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 번잡스러운 움직임 없이 느긋하게 엎드려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 언제나 온갖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한 나는 작은 행복을 온전히 누리는 해리가 부럽다. 또 매끼 같은 사료를 먹어도 맛있게 먹을 때, 반복되는 일상에도 따분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을 때 가끔씩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우리의 일상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는 나는 작지만 완전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해리가 또 부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벌이나 집안일에서 열외가 되는 해리가 부럽다. 유난히 출근하기 싫은 날 혹은 일이 바쁜 시즌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다가 해리와 눈이 마주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해리가 부러워 “팔자 좋아, 정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끔 해리가 소파 위에 누워 바닥 청소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이지 ‘돗자리에 누워 남 일하는 것 구경이나 하는 지주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이고 사는 인간에게 강아지는 참으로 부러운 존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 팔자가 늘 이렇게 상팔자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많은 개들이 일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강아지는 인간의 곁에서 제 밥값, 아니 그 이상의 일을 하며 살아왔다. 인간이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서 동물을 잡아먹고살던 시절, 인간에게 없는 능력(예민한 후각과 날쌘 추격 능력 등)을 지닌 개들은 인간을 도와 함께 사냥을 했다. 이러한 인간과 개의 협업을 통해 인간은 더 많은 사냥감을 잡을 수 있었고, 더 넓은 영역에서 더 효율적으로 사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가 석기에서 청동기, 철기로 바뀌는 기나긴 시간 동안, 또 인간의 주요한 먹이활동이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과 목축으로 변화하는 시간 동안 개들은 변함없이 인간 곁을 지키며 인간을 도와 일했다. 어떤 개들은 인간의 곁에 머물며 썰매를 끌거나 짐을 옮기는 등의 노동으로 가사를 돕거나 집을 지켰고, 어떤 개들은 목장에서 외부의 포식자로부터 가축을 지키고 가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모는 일을 했다. 개들은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는데 뉴질랜드의 양모 산업은 대표적인 목양견인 보더콜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개들은 이렇게 노동력으로 밥값을 증명해 내었을 때 먹이와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밥값을 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개들은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경찰이나 군인의 임무를 돕는 강아지, 구조 활동을 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활동을 보조하는 강아지, 그리고 집이나 여러 시설물을 지키는 강아지까지 오늘날 수많은 개들이 밥값을 톡톡히 하며 인간을 돕고 있다.
개들은 노동력뿐만 아니라 귀여운 외모와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왔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중세 유럽, 전근대의 중국 등 다양한 문명권에서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 강아지를 길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즐거움과 유희의 대상으로 강아지를 키운 것은 일부 사람들에 불과했다. 소수의 왕족 혹은 부유한 귀족 계층만이 강아지를 부양할 수 있는 여유와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강아지는 주인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왕실견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용품을 사용하며 하인들의 시중을 받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한 호강이 더 있을까 싶다가도 그런 개들이 행복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주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인의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물, 혹은 애완의 대상으로 강아지들이 이용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력 혹은 귀여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오던 개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오랜 기간 함께 지내온 만큼 인간과 개의 관계는 다양하며 역사적이다. 이 관계는 생산구조나 사회의 변동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물론 같은 시대에 다양한 관계가 공존하기도 한다.
최근의 변화(최근이라고 하기에는 긴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인간과 개가 함께 한 몇 만 년의 시간에 비하자면 짧은 시간이다)는 사회의 부가 크게 증가하고 사람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평등하게 되자 생겨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강아지에게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적 교감이다. 이렇게 강아지와 감정을 나누며 안정감과 친밀감을 느끼고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반려인이다. 반려인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충분히 증명한다. 반려동물은 누군가의 편안함이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자기다움을 지키며 반려인과 교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밥값을 하지 않는다고 해리에게 툴툴댈 때도 있지만 나는 해리가 나에게로 와서 함께 살게 되어 너무나 좋다. 요즘은 해리가 있어서 우리 집이 완성된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해리와 살기 전에도 나는 당연하지만 집에 살았다. 집 하면 건물 같은 물리적인 공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간에게 집은 그 이상의 어떤 공간이다. 무수히 많은 집을 거쳐 생활해왔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계속 머물 곳, 애써 가꾸어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 곳은 없었다. 이런 부족함을 느끼고 있지만 가족을 만들어서 채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과 생활공간을 나누는 생활방식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집은 항상 그냥 임시로 머무는 곳, 쉴 수 있는 곳 정도라고만 느껴졌다. 그러던 집이었는데 해리와 함께 생활한 이후 때가 되면 돌아갈 곳, 시간을 들여서 돌보고 싶은 곳, 함께 쉬는 곳이 되었다. 해리가 있어 집이라는 정서적 공간이 완성된 셈이다. 나에게도 누군가 기다리는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해리와 함께 사는 이유는 충분하다.
해리야, 팔자 좋은 모습으로 언니 배 아프게 해도 좋고 밥값 하지 않고 밥 많이 먹어도 좋으니 부디 지금처럼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러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