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27
요즘 들어 산책 길에 해리가 멈춰서는 것이 부쩍 늘었다. 멈춰 선 해리는 차오르는 숨을 몰아 내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잠시 쉬어가자는 눈치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웬만큼 높은 산도 곧잘 오르고는 했는데 올해는 평지 길도 조금 오래 걸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렇게 멈추어 쉰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2시간 이상 길게 등산을 다녀와 쓰려져 자는 강아지를 보고 "그래! 피곤한 강아지가 행복한 강아지다!" 하고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해리가 말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렇게 아직도 한창인 강아지로 느껴지는 내 마음과는 달리 녀석도 이제 조금 있으면 꽉 찬 일곱 살로 노령견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해리와 있을 때는 시간이 간다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리게 된다. 골든 리트리버는 나이가 들면 얼굴 털이 하얗게 변한다고 하는데 해리는 나이에 비해 아직 얼굴에 갈색 털이 많다. 사람으로 치면 동안인 셈이다. 하는 짓도 천방지축이라서 모습이나 행동을 보고는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체감하기 힘들다.
해리와 함께 하는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침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을 할 때나 햇살 좋은 날에 데크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해리의 털을 빗겨줄 때,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누워 낮잠에 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할 때, 마치 슬로비디오를 틀어놓은 듯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는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없는 특별한 시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른 감각은 멀어지고 해리의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만이 내 마음에 와닿는다. 그 순간 느껴지는 행복감은 내 삶의 하나의 결정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느낌은 나만의 착각이다. 우리가 까무룩 잠이 든 사이에도 시간은 바쁘게 흘러가서 어느덧 까만 밤이 찾아오고 내리던 비는 그치며 휴일은 끝이 난다.
그렇게 착실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해리도 나도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고통을 느끼고, 전에는 쉬이 하던 일들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 내 몸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서글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해리와 내가 똑같이 죽음으로 향하는 이 서글픈 여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도 다르지만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유기체이고 우리의 생명이 허락한 한 이 세상에 머물며 살아 숨 쉴 수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어쩌면 연약한 이 지점에서 해리와 나는 동등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서러움을 조금씩 알아가는 나는 산책 길에 자꾸 멈춰서는 해리의 심정을 헤아려 함께 쉬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유한한 시간의 끝에는 분명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강아지의 수명이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짧으므로 큰일이 없다면 떠나보내는 쪽은 내가 될 것이다. 아주 가끔 해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떠나갈지, 해리가 떠날 때 내 마음은 어떨지, 해리가 떠난 후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고는 한다.
골든 리트리버는 종양이 잘 생기는 유전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암에 걸려 무지개다리를 건널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 그 밖에도 근골격계나 위장기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고를 당해 떠나갈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리가 떠나는 날은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이다. 부디 마지막 순간에 가까울 때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해리가 너무 오래 아프지 않게 갈 수 있기만을 바란다.
해리가 떠나면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곳곳에 해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우리 집과 해리와 함께 걷던 이 동네에 살아가면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해리가 그리워져 마음이 무너지는 날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을 떠나 긴 여행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생각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딱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내가 아무리 그 순간을 상상하고 그에 대비하려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상상도 못 한 슬픔과 생각지도 못한 감정들이 밀려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해리가 떠난 후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해리를 기억할까. 함께 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나간 날, 함께 산에 올라 경치를 내려다보던 순간, 처음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그때, 특별한 장면들도 많이 떠오르겠지만 아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도록 머무를 해리의 모습은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아닐까 한다. 아침 산책을 가자며 신발을 물고 와 졸라대는 모습, 앞발을 턱에 괴고 자는 모습, 기다리다 지쳐 한숨을 쉬던 모습.
참 해리답다 생각하던 순간들도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모습 말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산책길, 해리가 갑자기 멈춰서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길가의 수풀에서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코를 부지런히 벌렁거리며 냄새에 더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몸이 정지화면처럼 멈춰있다. 냄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 들어 올린 한쪽 앞발은 내딛지도 못하고 가만히 들고만 있다. 해리는 무언가 집중할 때 이렇게 한 발을 들고 서 있다. 냄새를 추적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 발을 내려놓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참 별것 아니고 시시한 일이지만 이런 행동들이 해리다운 모습이다.
그렇게 해리를 기억하면 해리가 아주 멀리 가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늙음과 죽음은 생명의 섭리이니 우리의 몸이 이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생각은 유기체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해리가 나를 지켜보며 가끔씩은 우리 집에 다녀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면 해리가 세상에 두고 간 흔적들이 하나둘 사라질 것이고, 그럼 또 나는 새로운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아 가끔 해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낼 것 같다. 그러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해리가 갔던 길을 따라 무지개다리를 건너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해리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는 더 이상 착각이 아닌 영원을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부디 그런 일들이 되도록이면 먼 미래에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까지는 영원하지 않을 이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오래도록 해리의 감촉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