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운 Oct 21. 2022

갈피

이렇게까지 사랑을 나열할 문장이 많은 줄 몰랐다. 새벽의 온도가 저무는 노을을 희망할 때 나의 사랑은 도달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그 사람이 직접 만들어 준 책갈피는 페르난도 페소아의 산문집 ‘불안의 서’에 얌전히 잘 꽂혀있다. 불안의 서를 거의 다 읽기는 했다. 그 책갈피를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날 과음을 했고 그 사람은 나랑 만나기로 한 약속에 긴장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들었다. 미리 준비한 책갈피 몇 개를 가방에 넣어두고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 작고 조용한 카페로 갔다. 나는 그 사람에게 책갈피를 건네주었다. 그 사람은 너무 화들짝 놀라며 이건 운명이라 너스레를 떨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직접 만든 가죽 책갈피를 전해주었다. 포장까지 정성스레 만든 그 소중한 선물을 받으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 당시 마음이 들떠서 고맙단 인사도 깊게 하지 못한 거 같지만 시간이 지나 사용할 때마다 고마움을 표현했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일이 자꾸 겹쳐 우리는 서서히 운명이 되어갔다. 하지만 긴 여운을 가진 짧은 운명이 될 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별에 대해 나는 참 무능하다. 이미 쏘아 날아간 화살이 어찌 다시 돌아올까. 자꾸 거스르려는 내가 거울에 비칠 때마다 가루가 되는 것 같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온 첫사랑을 실패한다는 게 이렇게 쓰린 일이 될 줄 몰랐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이 현재가 이내 과거가 될 것을 잘 아는 나이. 이곳은 실패와 느린 잠이 얼룩이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언제쯤 끝이 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