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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꺾이지 않는 버들 Feb 20. 2023

축구장에서 '절'한 설

발에 처음 공을 대기 시작한 건 5년 전 풋살을 통해서였다. 풋살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구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다 풋살클럽 동료 동생이 가입한 여성축구회를 알게 되었다. 운동 시간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바로 신입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난해 봄 처음으로 풋살장보다 5배는 더 큰 것 같은 광활한 축구장에 첫 발을 딛게 되었다.

나의 '첫 축구'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우와, 넓다'. 두 번째 들었던 생각은 '우와, 모르겠다'였다. 열심히 공을 쫓아 뛰는데 공이 내 발에 닿는 시간은 너무나 짧고, 그 짧은 시간에 볼을 다루는 방법은 어려웠다. 언제 패스를 받고, 어디서 패스를 주고, 어떻게 슈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세 번째로 든 생각은 '우와, 재미있다'였다. 무작정 뛰느라 '빡세고' 무진장 어려워서 '빡센데', 무섭게 신났다. 아마도 나는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어떤 일에 재미를 느끼는 변태인지도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분(아마추어 경기 시간은 보통 20분 4쿼터식으로 진행된다) 경기 시간을 뛰고 나오면 플레이에서 부족했던 점들을 복기하고, '다음에는 이렇게 해봐야지' 다짐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축구에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봄이 지나고, 지난여름과 가을 사이 내 삶을 흔드는 사건을 겪었다. 반려자가 나를 떠나는 일이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생각하는 것마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한 계절을 송두리째 휘청이다 축구장으로 돌아왔다. 축구장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었고, 여전히 막막하게 넓고 답답하게 어려웠지만, 그동안 쌓인 나의 부정적 에너지들을 날려버릴 만큼 재미있었다. 죽자고 뛰는 동안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축구를 하는 동료들의 무심한 듯, 다정한 모습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람에게 다친 나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게 두려웠다. 축구인들은 축구를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기에, 운동이 아닌 개인의 서사를 잘 묻지 않고, 크게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오늘 경기에서 어떤 플레이를 펼쳤나, 뿐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의 응원이 필요한 때였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나를 견디게 해 주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팀은 운동을 쉬는 날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축구를 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2023년 2월. 새로운 축구동호인 문화를 알게 되었다. 바로 '시무식 및 안전기원제'. 축구동호회에서는 매년 초 한 해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시무식과 부상 없이 한해 운동이 끝나기를 바라는 안전기원제를 지낸다. 코로나19 사태로 2년 넘게 행사를 못하다가 올해 다시 시작한다고 회장님이 설명하셨다.


어쩌다 홍보국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된 나는 팀 운영진 중 한 사람으로서 행사 준비를 곁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행사 당일에 축구장에 가니 시루떡, 과일, 북어, 막걸리와 (돼지머리를 대신한) 돼지저금통이 단상 아래 차려져 있었다. 거기에 내빈 및 회원들을 위한 선물과 다과까지 수십 개가 놓였다. 초대장 문구 및 회장님 인사말씀 정리, 위촉장과 표창장 제작, 사후 행사 후기를 SNS에 올리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던 나는 행사 전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몰랐던 터라, '이거 생각보다 사이즈가 큰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빈도 화려했다. 시 관계자, 축구협회 관계자, 회장님 감독님 인맥을 통해 자리한 자문위원(이라 쓰고 후원자라고 읽는다)들까지 수십 명이 참석했다. 나름 격식과 품위를 갖춘 행사였다. 정치하는 이들이 왜 그렇게 축구동호회를 찾아다니는지 알게 되었다. 회원 및 관계자들이 100명 가까이 자리한 자리는 '표밭 관리'를 위한 성지일 수밖에 없겠다,라는 불순한 생각도 잠시 들었다.


국민의례-내빈 소개-내빈 인사 말씀-회장님 인사 말씀-감독 코치 위촉장 수여, 우수선수상 표창장(나도살짝 이름을 올렸다) 수여-안전기원제 순서로 행사는 진행됐다. 안전기원제는 고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돼지저금통 곁에 찬조금 봉투를 놓고 종교에 따라 기도를 하기도, 절을 하기도 했다.

봉투에 찬조금을 넣어 상 위에 올린 뒤 절을 했다.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운동장에서 절을 하는 날이 오다니.


평범한 여가활동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축구는, 축구동호회는 규모와 조직을 탄탄하게 갖춰야만 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행사를 전두지휘하는 회장님 및 운영진은 물론 행사에 참여한 회원들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모든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 회식을 하고 나는 몇몇 '뜻있는' 동지들과 2차까지 달렸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리고 작년과는 달라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나의 축구 동료들이 있었다.




행사를 지켜보면서 느꼈다. 축구인들의 동지애는 전우애 그 비스무리한 감정이라는 것을. 이 속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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