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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꺾이지 않는 버들 Jan 14. 2023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축구를 하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볼을 놓칠 수 있고, 패스를 잘못 줄 수 있고, 슈팅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자신의 실수를 얼마나 빨리 털어내느냐경기의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방금 내가 범했던 잘못을 빨리 잊고 포지션으로 원상 복귀해야 상대팀이 우리 팀의 허를 노리는 역습 상황을 막을 수가 있다.

이 점을 누가 모르랴. 모두가 안다.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운동장에서 내가 트래핑 실수를 하고 상대 선수에게 볼을 뺏기고 슈팅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되면서 무한재생 된다.




오늘 어르신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그랬다. 왼쪽 윙어로 죽자고 뛰었지만 자꾸 볼을 놓쳤고, 슈팅은 성급하거나 머뭇거렸다. 나도 모르게 '아 짜증 나'라고 혼잣말이 나왔다. 이래서는 팀의 1인분은커녕 반의 반인분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첫 번째 경기가 끝나고 어르신팀으로 옮겨서 남은 3경기를 뛰었다. 어르신팀 인원이 부족해서 자발적으로 손을 들고 간 것이다. 두 번째 경기가 끝나고 쉬는 시간, 안 풀리는 플레이가 속상해서 마음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어르신팀의 주장 분이 내게 말을 거셨다. 유니폼 뒤의 등 이니셜을 보고 B.D가 뭐냐고 하시길래 이름 ㅇㅇ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니 "ㅇㅇ아, 이리 잠깐만 와봐"라고 했다. 미드필더인 어르신팀 주장은 팀원들이 들리지 않게 얘기하셨다. "내가 공을 사이드로 찔러줄 때 골대 쪽으로 뛰지 말고, 사이드 라인을 맞춰서 옆으로 뛰어라, 그러면 공 받기가 훨씬 쉬울 거다"라고. 내 플레이를 눈여겨보셨고, 내 마음도 알아채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다른 이들이 듣지 않게 따로 불러 말씀해 주시는 그 '서윗'한 배려란. 내리는 가랑비가 눈에 들어갔나, 괜히 눈이 촉촉해졌다.(마흔이 넘으면서 사소할 만큼 작은 배려에도 금세 눈가가 그렁그렁해진다. 네. 주책, 맞습니다.)

3라운드에서는 내 뒤편의 수비형 MF 어르신이 나의 등번호를 부르면서 "88번, 내가 주면 받고 바로 다시 패스. 알겠지?"라고 알려주셨다. 경기장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어져서 그동안 훈련했던 2대 1 패스 등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딱 꼬집어 말씀하신 거다. "넵,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텅 빈 동네 풋살장에서 혼자 슈팅 연습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갑자기 웬 아저씨가 등장해서는 "공을 그렇게 차면 안 된다. 디딤발 힘주고 임팩트 있게 차라"며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치려든 적이 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내 공을 가지고 시범까지 보여가며. 그때 내 마음에 떠오른 단어는 '맨스플레인'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꼰대남성을 일컫는 말. 안 그래도 잘 안 돼서 속상한데 본인이 좀 할 줄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말투가 거슬려서 그날 연습은 목표 시간보다 빨리 접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 뒤에도 그런 남성들 몇몇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내 배알은 베베 꼬였다. '아, 됐고요. 안다고요. 안 물어봤다고요.'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내 표정은 썩어있었을 것이다.

오늘 어르신들의 조언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라도 알려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는 느껴졌다. 더군다나 같은 말을 하시지도 않았다. 목이 마르다는 어느 스님께 바가지를 떠줬더니, 인생을 바꾸는 가르침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그런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너무나 쿨했다. 주절주절 부연 설명이 없는 마디였기에, 마디는 오히려 귀에 쏙쏙 들어왔고, 뇌리에 콕 박혔으며, 경기장에서 최대한 해보려했다(물론, 해보려고 했다와 했다의 차이는 크지만).




오늘도 어르신들에게 한 수 배웠다. '짬'에서 나오는 티키타카와 무려 헤트트릭을 달성한 오른쪽윙어 분의 절묘한 슈팅은 입이 떡 벌어졌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는 최종 수비를 보시던 10번 어르신의 나이가 무려 여든셋이라는 것이다. 3경기를 연속으로 뛰셨는데. 와, 정말 대단하셨다. 존경, 그 잡채.

'저렇게 늙고 싶다'.

존경은 내 목표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되어도 뻥 차는 여자가 되는 것. 우리 팀 회장 언니 나이가 예순 가까이 되는 것도 정말이지 리스펙인데, 여든셋이라니. 나이 80이 넘어도 공을 찬다는 건 상상 가능한 축구선수 나이의 마지노선을 넘은 것이었다. 체력뿐만 아니라 파이팅도 넘치셨다. 그 부분도 너무 보기에 좋았더랬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축구를 한다, 씩씩하게. 하늘이 허락한 내 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분처럼 나이 들고 싶다.  



 

오늘 경기에서 그나마 내가 있다면 공을 끝까지 쫓아간 것이다. 그거 하나는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볼을 놓치지 않으려 다리를 최대한 빨리 움직이느라 몇 번이나 넘어지거나 넘어질 뻔했지만. 나중에는 어느 어르신이 놓칠 것 같으면 뛰지 말라고까지 하셨다. 체력만 빠진다고. 흐흐. '네,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끝까지 달려볼게요!'.




축구 경기 시간은 정해져 있고, 선수의 역할도 정해져 있다. 실패했다고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아버리면 경기는 망한다. 이틀 뒤면 내 인생은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다른 궤도에 오른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꿋꿋하자! 삶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볼을 끝까지 쫓아가는 마음으로.



경기 내내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촉촉해진 몸만큼, 마음도 촉촉해졌다. 축구 형님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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