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제목은 '뻥 차는 여자'라고 거창하게 달았는데, 막상 여기까지 글을 써보니 '뻥 치는 여자' 같다. 글만 보면 나는 어떤 역경도 이겨내고 마는 불굴의 사나...운 여자 같지만 '실존'의 나는 그렇지 않다. 새로운 상황 앞에선 쫄보, 개콘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울보(추억의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에는 의외로 신파적 요소가 많았다, 진짜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낙관하다 뒤통수를 맞는 바보가 바로 나다.
예전의 내 소신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였다. 지금의 내 신념은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간다'이다. 길을 가지 않는 것과 다른 길을 찾는 것은, 한 단어로 비교하면 '포기와 패기'라고 할 수 있겠다. 대충 세상이 그려놓은 길로, 고난은 쓱쓱 피해 가려고만 했던 나는 축구를 하면서 바뀌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족, 친구 모두 말렸다. 그 나이에 무슨 축구냐며. 간호사인 친구는 병원에 십자인대 끊어져서 온 아줌마들 많이 봤다며, 왜 숱한 운동 중 축구냐며 뜯어말렸다.
맞는 이야기다. 다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운동은 많다. 축구를 하면서 십자인대 파열은 종종 보는 부상이고, 다만 나의 사례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를 염려하는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축구는 끊을 수가 없다. 너무 재미있으니까. 다른 운동을 할 틈이 없다. 축구 하나만 잘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건 내 나이가 마흔을 넘겼다는 것에서 오는 조바심도 작용했다. 나이가 들수록 퇴화하는 운동신경이 원망스러워서, 축구장에서 나는 스스로를 좀 늙은이처럼 여겼다. 그러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세상은 넓고 뻥 차는 언니들은 많다는 것을.
지난해 정식 축구를 해보고 싶어서, 토요일 오전에 운영하는 여자축구팀에 들어갔다. 두 팔 벌려 환영해 준 회장님의 나이 거의 예순. 부회장님 50대 후반. 그리고 언니, 언니, 언니들. 이 팀에서 나는 '새파란' 나이였다. 아마추어 축구팀은 시나 도에서 개최하는 정식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KFA에 선수 등록을 해야 한다. 동호인 축구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 연령에 제한을 둔다. 보통 20대 2명, 30대 5명, 40대 이상 4명이다. 나이를 올려 뛰는 것은 안 되지만 내려 뛰는 것은 가능하다. 축구팀에서 나는 30대 선수로 '내려 뛰어' 대회에 나갔다. 40대 이상에는 이미 '고인물' 언니들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정식 축구는 역시 풋살과 달랐다. 무엇보다 그 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데 풋살보다는 덜 힘들었다(축구인 여러분 죄송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습니다). 내 포지션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풋살보다 어려웠다. 특히 롱킥과 중거리 슈팅, 킬패싱이 안 되는 나는 고인물 형님들 앞에서 '쩌리'였다. 풋살 몇 년 했다고 소개한 내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리고 무자비하고 얄미운 오프사이드는 또 어떻고. 죽자고 뛰어가서 뻥 차서 골망까지 흔들었는데, 삐-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다. 도대체 공을 언제 받으라는 거야? 축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오프사이드 때문에 애를 먹었다.
언니들과 축구를 하며 가끔 조기축구 아저씨들과 혼성 경기를 한 적이 있다. '새파란' 나는 풋살 경험자라는 타이틀에 먹칠이 되지 않게 온갖 발바닥 기술을 하며 공을 소유했다(고 쓰고 안절부절이라고 읽는다). 그때 저만치서 들려온 우렁 찬 목소리. "헤이, 패스 패스". 그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냉큼 그쪽으로 패스를 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온 뼈 때리는 한 마디. "너! 패스 안 주면 패스 못 받아". 아. 조기축구는 '공을 준 만큼 공을 받는' 상부상조 축구의 세계였던 것이다. 화려한 개인기는 이 바닥에서는 걸리적거리는 몸동작에 불과했다.
70대 이상으로 구성된 남성팀과 친선경기를 할 때는 그 절묘한 패스에 넋을 잃었다. 패스-패스-패스-킥-슈팅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발맞춤. 구력은 무시 못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았다. 배는 불뚝, 머리는 희끗한 어르신들이 거의 뛰지 않으면서(!) 골까지 연결시키는 과정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같은 팀원을 향해 "XX야 똑바로 안 해"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는 여기가 연병장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분들의 패스력은 숱한 욕먹음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들었다. 물론 상대인 우리 팀에게 거칠게 말이나 행동을 하신 적은 없다. 다만 그 터프한 에너지가 좀 생소하달까, 신기하달까, 그랬다.
올 겨울 폭설 뒤 아직 눈이 남은 축구장에서 정기 훈련 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공을 찬다, 고 회장님은 말씀하셨다. 언니들의 열정 앞에서 난 성냥개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