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멋지다!" "멋있다!"라는 말이다. 축구에서 '예쁘다'라는 형용사는 무용하다. 운동장에서 기가 막히게 패스를 주거나, 그림 같은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면 동료들이 "언니 멋있어요!"라며 엄지 척을 날렸다. 그러한 칭찬은 나를 덩실덩실 춤추게 했다. 민낯에 땀을 뚝뚝 흘리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동료들의 모습도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쌓인 갖은 고민과 걱정과 스트레스를 공에다 싣고 뻥뻥 날려버렸고, 생을 뒤흔드는 악재 앞에서도 "그 따위 고민은 개나 줘버려"라고 호기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한 호기는 축구를 하면서 "멋있다"라는 말만큼 많이 듣는 말"파이팅" 속에서 자라났다.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팀원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축구장 밖으로도 확장되어, 일상에서도 어떤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주었다. 운동을 하면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어 행복감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이 감정이 호르몬의 장난일지라도 권태로운, 혹은 위태로운 삶에 활력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축구는 분명 가장 부작용 없는 우울증 치료제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축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심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들은 가족의 죽음, 시집살이와 생계노동, 직장갑질이나 사내 따돌림 등으로 병원 문을 두드려야 할 정도의 심각한 우울과 불안증세를 겪었다.
나 역시 가정사로 인해 지금 공황장애를 앓고 있고, 항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다. 증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여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축구를 하는 일도 멈췄다.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지만, 아이를 키워야 했고, 회사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날마다 에너지를 쥐어짜 하루하루를 견뎠다. 두 달 사이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빠졌으니 당시 나의 몰골은 걸어 다니는 해골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좋은 정신과 닥터를 만난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진료를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나갔다. 그때마다 원장님은 나의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들어주셨다. 나의 신체적 반응에 맞춰 약도 바꿔가면서 처방해 줬다.
그는 억지로라도 먹고,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먹고 운동을 하면서 깊이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닥터의 말을 믿고 두 달 넘게 쉰 축구를 의도적으로, 억지로 몸을 이끌고 나갔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피폐해졌기에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체력을 끌어올리고 기본기를 다시 익히고 팀원들을 다시 만나면서, 낮은 포복 자세의 병사처럼 기어올라갔다. 우울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저 일상의 꼭대기를 향해, 젖은 수건을 쥐어짜듯 온 힘을 다해.
우울의 골짜기, 공황의 터널을 지나 내가 다시 찾은 곳은 축구장이었다.
축구는 늘 거기에 있었다. 세상사로 녹초가 된 탕자를 두 팔 벌려 반겨줬다. 팀원들과 다시 발을 맞추고 훈련을 시작했다.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것 같았다. 아마 우린 늘 같은 유니폼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서 좋았다. 만약 돌아간 팀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면, 나를 반기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다시 우울의 바닥을 헤매었을 것 같다. 그들에게 고마웠다. 그대로 있어줘서.
축구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도, 잘 차고 싶다는 열정이 다시 타오른 것도 다행이었다. 나는 이런 나에게도 감사하기로 했다. 집-회사-축구장이라는 삶의 궤도로 다시 진입했다. 궤도이탈했던 몸과 정신력이 삐걱삐걱거리면서도 자기 위치를 찾으려 했다.
봄부터 함께 한 오산팀은 내게 가장 '우리 팀'이라는 소속감을 준 팀이었다. 감독과 코치, 주장 및 운영진의 끈끈함이 우리 팀의 최대 장점이었다. 축구를 향한 열정이 뜨겁다는 것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나 같은 여자와 결이 딱 맞는 팀이랄까.
문제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신감이었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을 당한 뒤로 나의 멘털은 무너질 때로 무너졌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냥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축구였다.
2022년 11월. 우리 오산팀은 여자풋살대회에 나가게 된다. 대회라니. 해낼 수 있을까. 체력도 실력도 멘털도 바닥이었지만 용기를 냈다. 뭐가 되든 해보고 싶었다. 뭐라도 해서 바닥을 친 자존감인지, 자신감인지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올리고 싶었다. 곁에는 나(이 늙은이)를 받아주고 격려해 주는 팀원들이 있었다.
그들과 하루 종일 치른 전투에서 우리는 3위를 거뒀다. 성적보다 더 값진 건 성장이었다. 꾸린 지 1년이 안된 사이 우리 팀은 이전보다 훨씬 '잘 차는' 팀이 되어 있었다. 바닥난 멘털의 나도 한발 빼기 기술로 상대를 제치고 골대에 공을 때려 넣었다.
내가 골을 넣었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해 준 건 동료 동생들이었다. 한 동생이 외쳤다. "거봐! 언니 되잖아!"
아. 된다. 됐다. 되기까지 소쩍새는 얼마나 울었던... 아니 훌쩍이며 연습, 연습을 했던가.
개인의 성장이 팀의 성장이 되었고, 개개인의 응원이 팀의 기세가 되었다. 이날의 대회는 출전했던 다른 어떤 대회보다도 하나의 팀이라는 연대감으로 충만했다.
생은 늘 눈 하나 깜짝 않고 뒤통수를 후려친다. 얼얼해진 머리를 감싸고 뒤 돌아보면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잔뜩 쌓여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를 보내면서, 뒤통수를 맞으면서 나는 시시때때로 멍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까짓 거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뻥 차버리는 마음의 힘은 축구를 통해 길러졌다.
분명 그렇다.
이날 우리 팀의 새 역사를 썼다. 이제 겨우 첫 페이지다. 한 권의 역사책이 완성될 때까지 달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