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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꺾이지 않는 버들 Jan 05. 2023

선수는 시합을 뛰어야 돼(중)

인생 첫 풋살대회는 그렇게 냉혹하게 막을 내렸다. 대회가 끝난 뒤 슬럼프에 빠져 공 차는 일을 그만둬야 하나, 까지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치기 어린 낙담이었다. 고작 5개월.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클럽에 나가는 주제에, 뭘 제대로 해봤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간을 보냈으면서 포기부터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만둘 수는 없었다. 대회는 나를 주저앉히려고 했지만, 다시 나간 운동장에서의 땀은 나를 다시 신나게 했기 때문이다. 진짜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다. 마음대로 몸은 움직여주지 않아서 안달이 나는데, 그냥 공을 쫓아 뛰기만 해도 즐겁다. 중독이었다. 대회 이후 '팀에 민폐가 되지 않겠다', '1인분을 해내고 말겠다'라는 다짐까지 겹쳐 종일 축구 생각만 했다. 일요일만 나가던 클럽을 평일 저녁반까지 신청해서 나갔다. 그러던 중 새끼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다리 곳곳에 멍이 가시는 날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차러 나갔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나간 이유에는 내 나이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불혹에 가까워진 나이. 언제까지 축구라는 과격한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이 나를 운동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 조바심이 불혹 하고도 두 해를 지난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정도의 멍과 타박상은 일상이 되었다. 중요한 건, 점점 안 다치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코로나가 터졌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담도암 시한부 선고를 받고는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투병 생활을 돕기 위해 축구도 잠시 멈췄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복귀까지 몇 달이 걸렸다. 예견된 죽음이었음에도 느닷없었고,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괴로웠다. 내가 좀 더 잘 보살폈다면 더 사셨지 않았을까,라는 자책으로 힘들었다. 하늘도 원망스러웠다.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지만, 나는 또 고질병인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팀스포츠를 할 수가 없었다. 자괴감의 구렁텅이 빠진 나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축구를 쉬는 대신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 앱을 이용해서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다. 달리는 동안만큼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이 드니까. 힘이 드는 일을 덜어내기 위해 힘이 드는 달리기에 빠졌다. 달리기 기록이 점점 좋아지는 즐거움도 찾아왔다. 러닝 동지들이 생기면서 서로 응원하는 재미도 나를 더 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컴컴했던 마음속 터널의 끝이 보였다. 마음속 먹구름은 물러나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졌다. 러닝은 정말이지 좋은 운동이었다. 신체와 정신 모두 단단해지는 게 숫자로 나타났다. 10km를 50분대에 주파가능한 몸 상태가 되자, 다시 축구가 하고 싶어졌다.

 



6개월 정도의 공백을 끝내고 돌아온 2021년 복귀 3주 차 때의 모습.


축구장으로 돌아간 건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신 이듬해, 2021년 봄이었다.

하늘색으로 바뀐 새 유니폼을 입고 풋살화의 끈을 질끈 묶었다. 오랜만에 공을 차니 설레었고, 여전히 재미있었다!(이런 요물. 내가 어떻게 널 잊겠니) 새로 온 팀원들도 많았다. 그 친구들과 매주 1번 이상 클럽에서 만났다. 무엇보다 러닝을 1년 정도 꾸준히 해 온 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체력면에서 강해지고 몸싸움이나 스피드도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다. 피지컬적인 능력이 좋아지니 공 차러 나가는 요일이 다시 기다려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11월. 두둥. 내 인생 두 번째 대회가 찾아왔다.


두 번째 대회는 첫 번째만큼 긴장되지 않았다. 즐기자는 마음이 컸다. 물론 이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몇 개월 간 동굴 속에서 지내다 나오니, 승리 같은 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도 닦는 마음 같은 게 생겼다. 확실히 첫 번째 대회 때보다는 여유가 생겼다. 그저 팀원들과 힘껏, 마음껏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게 즐거웠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공자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웃으면서 임했던 그 대회에서 나는 한 골도 주워 먹고(?) 팀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 대회에서의 승리는 짜릿했다. 승리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마음은 거짓말이었나 보다. 이기니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 맛을 느끼려고 무수한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세계 대회를 준비하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더 이상 나는 아버지를 여딸도, 11살 아들을 키우는 엄마도, 매일 마감에 쫓기는 직장인도 아니었다. 나는 선수였다. 대회는 내게 선수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려줬다. 올가미 같던 누구의 누구. 어디의 누구. 39살의 누구가 아닌, 선수 ○. 이 새로운 호명은 명백하게, 나를 춤추게 했다.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무아지경에 빠졌던 나와 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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