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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꺾이지 않는 버들 Jan 02. 2023

선수는 시합을 뛰어야 돼(상)

지금까지 '뻥 차는 여자'의 졸문을 읽은 독자라면 "그래 너 훈련 열심히 한 거 알겠어, 경기는 언제 시작할 거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저질체력 몸치 선수가 대회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하여.


연습 경기가 아닌 첫 대회에 나간 것은 2019년 9월이었다. 내가 속한 클럽(여자축구계 '메가스터디'라고 할 수 있다)에서 주최한 대회였다. 클럽 회원 200여 명이 출전했 대회는 대한민국에 여자축구 붐이 불기 전이라, 당시 최대 규모(아마도?) 아마추어 여자풋살대회였다.


겨우 구력 5개월 차였던 나는 풋살대회를 학교 운동회 정도로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전 자체에 의의를 둔 나와 달리 동료들은 승리 욕심이 어마어마했다. 전의에 불타오른 그 시절 축구 동료들은 정규 훈련 시간 외에도 만나서 볼연습을 하자고 했다. "그건 나도 찬성!" 서울이 직장인 나는 우리 팀 대부분 선수들의 생활 반경인 수원으로 퇴근하자마자 튀어갔다. 캄캄한 밤, 빌딩 옥상 풋살장의 조명은 우리를 핀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다. 이 장면만 상상하면 청춘 드라마의 한 컷 같지만, 이때 내 마음은 불편했다.




아직 축구를 하기에는 몸이 따라주는 내가 패스 연습을 하면서 자꾸 공을 놓치자 한 선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 눈빛에 당황했다. 패스 훈련이 끝난 뒤 연습 경기를 할 때, 상대팀으로 뛴 그는 내게 심하게 몸을 부딪히기도 하고 옷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건 명백한 비난이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싸움이 일어났다. 나를 얕잡아 보는 그의 태도에 웃음으로 응대했다. '잘 봐, 이게 언니의 내공이다'를 보여주듯이. 더 황당했던 건 자신의 플레이가 잘 풀리지 않자 그는 금세 고개를 떨구고 씩씩거리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나는 슬슬 화가 났고, 오기가 슬슬 올라왔다. 더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내 체력과 기술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결국 나는 오른쪽 허벅지 근파열을 얻었다. 대회를 고작 2~3주 앞둔 시점이었다.


축구는 팀이 하는 스포츠다. 팀워크가 중요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당시 우리 팀원들 모두 '초짜'였고 우리는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누군가 나서서 팀의 분위기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우리 팀 주장이었던 체육교사 A였다. A는 훈련 시작부터 앞장서서 구령을 외치고 연습 경기 내내 팀의 사기를 올리는 응원의 말을 많이 했다. 교사 특유의 조율(?) 능력 덕에 그 뒤 대회날까지 큰 잡음 없이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무매너인 그를 '아웃 오브 안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부상당한 다리였다. 걸을 때는 무리가 없었는데 뛰기만 하면 근육이 땅겨서 너무 아팠다. 동네 정형외과에서는 한 달은 쉬어야 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내 인생 첫 풋살대회는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출전이 간절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못 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안달이 났다. 부상이 빨리 나으려면 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번외 연습은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대회날이 되었다. 푸르게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막상 경기장에 들어서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제대로 뛸 수 있을까, 겁이 났다. 5대 5 풋살에서 내 포지션은 FW였다. 코치가 내린 지령이었다. 내 공격을 한다고? 골을 넣으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발이 느린 나는 수비수가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코치의 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공격수로 대회를 뛰었다. 풋살에서는 선수 교체가 무제한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죽을 만큼 뛰어도 발에 공을 대지도 못하는 내게 교체 신호는 사형수에게 내려진 형집행 정지 같은 것이었다. 선수가, 뛰는 게 두려웠다. 


우리 팀의 전적은 7경기 2승 2 무 3패로 기억된다. 그날 나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공격수였다. 부상당한 허벅지 문제도 있었지만, 그냥 나는 못 뛰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연발했다. 순위권 밖으로 밀린 팀의 성적이 모두 내 탓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닌 다른 선수가 뛰었다면, 승패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동료들이 언니 탓이 아니다, 힘을 내라고 말해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들이닥쳤다. 내 인생 첫 대회는 그렇게 '마상(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팀의 1인분이 되어야겠다'라는 각오와 함께.



2019년 9월. 인생 첫 풋살대회. 개막식 전 우리 팀 팻말을 높이 들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어벙벙'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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