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세계는 냉정하다. 프로나 아마추어나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실력이라는 것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게 문제다. 반박 불가한 'another level'의 선수는 어느 팀이나 손에 꼽힌다. 나머지 선수들의 능력치는 프로는 프로대로,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대로 비등비등한 경우가 많다. 어느 팀이든 선발 선수를 뽑을 때마다팀 내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기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축구에서는 학연 등 인맥으로 이어지는 줄 세우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아마추어는 감독이나 회장의 친분으로 인한 선수 결정이라는 오해가 자주 발생한다.
처음 풋살대회에 나갔을 때, 우리 팀의 코치는 내게 FW를 맡으라고 했다. 아마 코치 나름의 뜻이 있었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공격수를 꿈꾸던 그 시절에 나의 포지션 배정은 다른 선수들에게 물음표를 던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공 차는 짬이 조금 쌓이면서부터이다. 선수 엔트리에 예상하지 못했던 선수가 내가 선호하는 포지션을 맡거나, 선발로 뽑히는 걸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심 '내가 왜 저 선수한테 밀렸지?' '내가 좀 나은데?' 혹은 '걔나 나나 비슷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실력을 스스로 평가하면서 자만심이 자랐던 것이다. 그 자만심은 동료 선수를 향한 질투심을, 질투심은 팀의 감독과 코치를 향한 서운한 마음을, 서운한 마음은 다시 자괴감과 열등감을 불렀다. 마음 상태가 그 모양이니 플레이는 더 엉망이 되었다. 그러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가슴속은 미묘한 파장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유치한 것 같지만 선수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경험이 한 번씩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장에서 몇 분 뛰어 보지도 못하고 대회를 끝낸 어느 날이었다. 시기심과 서운함과 자괴감이 짬뽕으로 요동쳤다. 공은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속 시끄러웠던 그날 밤. 하늘의 달은 이런 내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야속하게 둥글었다. 빵빵하게 바람이 꽉 찬 축구공처럼.
'달아, 너까지 거슬리게 하기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처음으로 '진지하게' 축구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축구란 무엇일까?'
'뭐긴 뭐야. 골대에 공을 넣는 게임이지.'
'아, 그렇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축구는 어쨌든 결과를 내야 하는 스포츠다. 패스를 주고받다가 끝내도 좋은 공놀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선발이 못된 것도, 원하는 포지션을 받지 못한 것도, 경기 투입 시간이 짧았던 것도 결국은 '결과'를 위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나 혼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팀이 내는 것이다. 나를 서글프게 한 감독의 결정도 결국 팀을 위한, 팀의 결정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결국 나를 괴롭게 한 건, 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내 마음의 본질을 깨닫자 그날 이루어졌던 모든 선택과 결정들이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이해로 바뀌었다. 자기방어적 논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논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누구를 탓하는 것도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목표가 생겼다.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나로 결정할 수 밖에 없는 선수가 되리라!' 이건 오기와는 다른 마음이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내려놓을 건 내려놓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조금 더 축구를 즐기게 되었다.
축구에 관한 수많은 레토릭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공은 둥글다'이다. 11명의 선수(풋살일 땐 5명의 선수)가 오직 공 하나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나이도, 성별도, 인종도, 종교도, 취향도 중요하지 않다. 백전백승의 팀이 만년 꼴찌 팀에게 무너질 수도 있는 게 축구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누구도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 그저 골대를 향해서, 전진할 뿐이다. 상대의 강력한 태클에 걸리더라도 다시 일어선다. 악착같이 쫓아가 상대의 슈팅을 막는다. 축구는 어느 팀이 더 기술이 좋은가의 대결이 아니다. 어느 팀이 더 악바리인가의 대결이다.
축구는 끝날 때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마치 우리 인생처럼.
넘어져도 일어나야만 한다. 한정적인 경기 시간 안에 결과를 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 공은 둥그니까,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우리의 플레이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