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9월은 내가 몸 담은 업계의 협회에서 대규모 축구대회가 열리는 달이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각 회사를 대표해서 그라운드에 오른다. 대회는 무려 3주(경기는 매주 주말 하루)에 걸쳐서 60여 개의 팀이 참전해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만성 선수 부족을 겪는 우리 회사는 10년 가까이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배 기수들이 나타나면서 올해는 기적적으로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의기투합한 몇 명의 후배들이 있긴 했지만, 축구는 11명이 뛰어야 하는 법. 주장으로 나선 후배가 선수 모집에 들어갔다. 남자선수들이 뛰는 대회이긴 하나, 여자선수가 출전하지 말라는 규정은 없기에 주장 후배의 영입 엔트리에 나도 속하게 됐다. 사내에 이미 소문난 '공 차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같이 뛰자는 제안을 받았을 땐 남자들과 뛰어야 하는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면 재미있겠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배 나온 아재선수들 보다는 주 3일 이상 공을 차는 내가 낫지 않을까 하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회사팀 유일의 여자 선수로 대회에 나가게 된다.
64강 예선전 날. 하필 내가 사는 곳과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경기가 열렸다. 하필 주말의 광역버스는 내가 서 있는 정류장을 만차로 통과했다. 청청한 9월의 주말. 하필 차는 엄청나게 밀렸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경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반전 경기가 끝난 상황. 지하철역에서부터 전력질주로 뛰어 왔으니 몸은 안 풀어도 된다고 팀원들에게 말하고 후반전에 투입했다. 늦게 들어왔으니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날 경기장에서 여자선수는 나 혼자였다. 후반 경기가 시작되고 곧 깨달았다. 남자선수들과 뛰는 건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를 몸으로 '체감'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름 축구 짬이 있어서 상대 선수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고 뛰었지만, 나는 느렸다. 상대선수가 공을 치는 방향으로 뛰었지만, 한 발이 늦었다. 나를 제치고 치고 나가는 상대선수의 등짝을 보면서 열이 팍팍 올랐다.
아마추어 대회라 경기시간은 전후반 15분씩이었다. 전반전은 0대 0 상황으로 끝이 났었다. 후반전 7분쯤 드디어 우리 팀에서 골이 터졌다. 이제 지키는 것이 관건. 왼쪽 미들 포지션에서 죽자고 뛰었다. 한 놈만 잡는다는 각오로 악착같이 상대팀 공격수를 따라다녔다. 후반전 종료 3분여를 앞두고 팀 감독선배가 '전략적으로' 나를 교체했다. 나도 '전략적으로' 천천히 그라운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관중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타 회사 응원단에서 내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뭉클했다. 축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모르는 이들에게 박수를 받은 것이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더 있었다면 노련한 프로선수처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을 텐데,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열기로 벌게진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달아올랐다.
예선 1차전을 승리로 끝낸 뒤 감독선배가 말했다. '○○아, 난 관중석에서 기립박수가 나왔을 때 울 뻔했다. 정말 잘 싸웠다'라고. 나는 자뭇 센 척하며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답했지만 사실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는다는 것, 나의 플레이가 박수를 받는다는 것은 선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인 것이다.
오후에 열린 32강전에서는 전후반 풀타임으로 뛰었다. 체력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전의가 불타오른 나는 전 경기보다 더 '빡세게' 수비를 했다. 경기는 0대 0 무승부로 끝나고 승부차기 끝에 우리 회사팀은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남자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슈팅이 약한 나는 승부차기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대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축구는 어쨌든 결과로 이야기해야 하니까. 우리 팀의 승리가 확정되었을 땐 팔짝팔짝 뛰었다. 이겨서 기뻤다.
경기가 끝나고 업계협회 집행부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출전 동기와 소감 등을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바로 협회 홈페이지에 기사가 올라갔다. 등번호 7번을 달았지만 박지성 같은 플레이를 보여줬다는 경기에 대한 평이 담겨 있었다.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하는 나의 뒤태 사진과 함께.
부서 단체톡방을 비롯해서 사내 지인 여러 명이 기사 링크를 첨부하며 나의 활약을 칭찬해 주었다. 으쓱했다. 남자선수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최선을 다한 내가 대견했다. 대회에 나가면 자부심보단 자괴감에 늘 시달렸는데, 이날만큼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멋있었다. 그건 내게 응원과 박수를 보내 준 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