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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Mar 13. 2022

해파랑7-대숲에 소금기 섞인 강바람



벌써 7코스다. 일요일에는 모처럼 비가 온다는 예보

서둘러 길을 나섰다.


7코스는 태화강을 휘돌아 염포까지 가는 17.5km 구간이다


태화강전망대에서 구 삼호교와 십리대숲을 지나

만회정과 태화루를 거쳐 아산로를 쭉 따라가면

염포를 만난다








취수탑을 개조한 태화강 전망대를 돌아 나오면 오래된 다리와 만난다.

구삼호교다. 남구 무거동과 중구 태화동을 잇는 태화강 교량의 첫 지점에는

3개의 교량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뇐 다리가 구삼호교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울산과 부산 간의 내륙교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건설된 다리다.

태화강의 첫 교량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 구 삼호교는 오래되고 낡아

보행자 전용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중구로 넘어오면 마두희와 만난다.

울산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동네 화합의 축제

마두희라는 대동놀이 문화가 있다.

울산이라는 지역의 큰 줄다리기 행사라 보면 된다.


이 축제는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겼다.

울산의 오래된 줄다리기 놀이는 그 이름도 특별하다.


낯선 이름 마두희는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에 족보가 기록돼 있다.

동대산이 바다로 빠져드는 형세가 말머리 같이 생겼다는데서 기인한

'마두'와 그 마두가 마을을 등진 채 바다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놀이로 돌려놓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말이 머리를 동해로 두고 마을의 기운을 뺏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심리는 지역민을 하나로 모이게 했고

굵고 질긴 짚단을 끈으로 엮어 줄다리기의 대동놀이로

말의 기운을 다시 끌어들인다는 발상이 마두희였다.


우리 민족다운 발상이다.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두고

수용과 관용의 미학으로 역신을 다스린 처용의 춤사위나

거대한 자연의 기운을 대동의 힘으로 끌어당겨

한곳에 응집해 보려는 마두희의 발상은 놀랍게도 닮았다.



마두희 실제 모습



대숲을 지나 태화교로 방향을 틀면 영남 3대 누각 태화루와 만난다

자장율사의 태화사지 이야기로 시작되는 태화는

고려조, 태화루로 정점을 찍었다.


부침을 거듭하던 태화루는 왜란의 화마에 완전히 사라졌지만

산업수도 울산이 공업과 공해라는 단어를 떨치며

태화강에 생명줄을 심으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 결실의 하나가 태화루 복원이다.

마침 아랍의 재벌 수베이가 에스오일의 대표로 통큰 기부를 했다.

태화루를 복원하는데 100억원을 선뜻 내놓았다.

수베이의 기부는 단순한 대기업의 지역사회 공헌을 넘어

울산에 대한 아랍권의 감정적 교류를 느끼게 했다.


에스오일 수베이 대표는 한국식 이름으로 '이수배'라고 자신을 알리고

울산 이씨의 본관을 사용할 정도로 울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국적이 사우디 아라비아인 그가 

유독 울산에 애착을 가지는 것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천년 항구 울산의 역사를 거슬러보면

수베이의 유전인자 속에 울산의 흙과 바람,

숲과 햇살이 녹아 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년전 울산은 국제항구였다.

아라비아 해를 지나 

인도양과 남지나해를 넘나들던 무역상들에게

울산은 꿈의 항구였다.


대륙의 동쪽 끝, 

금의 나라 신라는 아라비아는 물론

로마제국의 상인들까지 목숨을 건 항해에 뛰어들게 했다.


기록과 흔적이 많지 않아 

사실관계를 명정하게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 무렵 개운포와 

외항강 하류 반구동 일대는

아랍권과 중국, 왜에서 온 무역상들이 북적였다.

그 무렵이 바로 8세기다.


울산과 이슬람 문화를 연결하는 증좌는 또 있다.

경주시 외동면에 있는 원성왕릉 앞의 무인상은

영락없는 아랍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부릅뜬 큰 눈이 치켜올라 갔고, 쌍거풀진 눈이 푹 들어갔다.

큰 코는 콧등이 우뚝하고 코끝이 넓게 처진 매부리코이며,

큰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귀밑부터 흘러내린 길고 숱 많은 곱슬수염이 목을 덮고

가슴까지 내리닫고 있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다. 

바로 처용이다.






잠시 1,000년의 세월을 

타임머신으로 이동했지만

다시 대숲으로 돌아왔다...

대숲은 생태의 상징이지만 

오래된 강바람을 타고 흐르는 울산의 옛 이야기다


대숲조차 정치적 행위에 연루돼

한 때는 백리대숲 운운했지만

태화강은 십리대숲이 심장이다.

 

대한민국 제2호 국가정원은 

바로 이 십리대숲이 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 국가정원 제 2호

태화강국가정원이 예술이 옷을 입고

용트림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정원예술가 피터의 정원작품이 

울타리를 치고 한창 조성중이다.

올봄 이 정원을 보기위해

세계인의 발길이 

태화강국가정원으로 모일 것이라니 기대가 크다.



태화강,,,

7,000년전 태화강이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부터 이 강에서는

인류사의 위대한 노정이 시작됐다.


그 질곡의 시간을 굽이쳐 흐른 강이 국가정원이라는

새로운 명패를 얻었다.

굳이 이름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름표 자체가 대전환의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선사문화의 첫발을 디딘 이 땅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역사시대의 혈맥이 됐고

그 동맥이 삼한통일의 심장소리로 쿵쾅거렸다.


그 후로 1,000년, 유배의 땅이 되고

침략의 폐허로 버려졌던 땅이 부활했다.


조국근대화의 새 이름표를 단 이 땅에서

산업의 불기둥이 올랐고 

강은 더럽혀지고 물길은 사나와졌다.


질곡의 그 강이 이제 영욕을 딛고 국가정원이라는

표창의 이름표를 달았으니 분명 벅찬 일이다.








아산로다.

고인이 된 왕회장(아산 정주영)이

태화강 하구를 따라 길을 열고 울산시에 기부체납 한 도로다.


이길을 따라가면 현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수출용 염포만 부두에는 자동차 수출용 선박과

차량 행렬이 산업도시 울산을 웅변한다.





바다와 만나는 태화강 하류는 

강폭이 600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강어귀다.

강 건너편에 태화강 수상 레저 계류장이 있다.


윈드서핑, 카누, 조정, 고무보트 등의 수상 활동도 가능해

걷다보면 가끔 서퍼들도 만날 수 있다.





염포다.

소금밭이 많았다고 해서 염포라 이름이 붙었다.

세종 때 삼포 개항으로 유명한 지명이다.

부산포, 진해 내이포, 울산 염포가 주인공이다.


삼포 왜란 후 국제 무역항의 지위를 잃었지만

100년전까지는 어업으로 번창하는 마을이었다.








염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동해안의 최대 소금 산지였다.

울산만의 천혜의 자연조건과

넓은 산지에서 나오는 풍부한 땔감은

벽화에서처럼 끓여서 만드는 자염을 생산하는데 최적이었다.



울산의 소금밭은 햇살에 말리는 천일염이 아니라

끓여서 얻는 자염방식이다.

자염은 천일염에 비해 칼슘이 1.5배,

유리아미노산이 5배나 많은 반면

염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김치를 담글 때 유산균 개체수를 증식시키는

효과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 특별한 소금도 일제의 천일염 도입과 

산업단지 가속화로 사라졌다.




섭씨 18도.

갑자기 찾아온 봄 기운에

훌쩍 달라진 풍광을 느낀 해파랑 7코스였다.

다음주부터는 봄 빛이 더 왕성해 질 터

푸름을 호흡할 걷기의 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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