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제주 반 달 살기 기록
제주에 있는 동안은
알람을 맞추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
근데 눈 뜨니 6시도 안 된 시각..
전혀 일정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시작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데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기엔 제주가 아까웠다
걸어서 30분 정도 내려가면 바다가 있다.
바쁘지 않으니
작은 길로 사목사목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마주친 물방울 맺힌 청귤들
사실 이렇게 외진 길이라서
농사일을 나가시는 어르신들 두어 분 외엔
인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좀 무서웠음.
그런데 무섭다 생각하면 계속 무서우니까
그냥 걸었다.
안개 낀 제주 남쪽 바다, 그리고 문섬이 보인다.
문섬이 맞나?
남쪽에는 문섬, 범섬 그리고 섶섬이 있는데
맨날 헷갈린다.
날씨가 쨍-하면 더 좋겠지만
흐린 제주도 그런대로 운치 있다.
하지만 습도가 99%에 달해
어항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뚜벅이 여행의 좋은 점
뜻밖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저곳은 <코츠커퍼>라는 카페이다.
마침 오늘이 휴무라 내일 가 볼 곳이 생겨
조금 설렜다.
아침 산책 1 시간 하고,
아침밥도 먹고 샤워도 했는데
고작 9시였다.
그래서 또 잤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11시였다.
그동안 시간을 촘촘히 써왔어서 이런 여유가 정말.. 어색했다.
이렇게 뒹굴대며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나 쉬러 온 거 맞지?
도민들만 책을 빌릴 수 있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회원가입만 하면 외지인도 책을 대여할 수 있단다.
욕심부리지 않고, 딱 두 권만 대여했다.
<실패를 해낸다는 것>
그리고 <일 잘 잘 (일 잘하고 잘 사는 삶의 기술)>
뭔가 대치되는 두 권인 것 같지만,
잘 살고, 일도 잘하고 실패도 잘 해내고 싶은 복합적인 마음에 선택한 것 같다.
정지의 힘, 멈춤의 가치를 인정하자.
멈춰 섰을 때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달리는 것 좋다.
근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뛰어오다가 뭔가 흘리고 온 건 없는지
또 무릎이나 발목이 아프진 않은지
잠시 멈춰 서서 정비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간이 지금 퇴사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반달살기 주 서식지인 다이빙샵에 도착하니
[스쿠버다이빙]이라는
없던 글씨가 벽에 쓰여있었다.
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미용실이냐고 물어서 적었다고ㅋㅋㅋㅋ
여기에 내 애매한 재능을 추가해
살짝 찌부된 대두 거북이를 그려 넣었다.
처음에 망할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하다 보니 또 재미있어서
틈나는 대로 짬짬이 벽에 바다친구들을 채워 넣기로 했다 ㅋㅋ
아침 산책, 도서관,
그리고 미니 벽화 그리기까지 마쳤는데
오후 5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근무시간 8시간이 통으로 들어내지니
이렇게 여유 있나 싶고..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
그러던 중 마침 제주올레5일장이 열렸대서
스텝분들이랑 같이 이동했다
매월 4/9일에만 열리는 5일장
한 달에 두 번 만 열리는 건가? 했는데
369 게임처럼 4와 9가 들어간 날짜에 열리는 거라고 한다.
난 딱히 살게 없다가도
매번 끼니를 사 먹으면 돈이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 같아
아침 대용으로 먹을 사과 4개를 샀는데
만 원이다...
이러나저러나 돈은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