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oo초등학교 교감이라고 밝히며,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아냐고 다시 꽥꽥 소리를 질렀다.
진상인즉, 강사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들어 글을 썼고, 아이들에게 청와대 게시판에 한번 올려보자고 한 것이었다. 즉흥적이지만 아이들에게 좋은경험 아니냐며 강사는 별일아닌데 시끄러워진데 대해 뜨아해했다. 어쨌든 그 글은 바로 게시됐고, 누군가를 거쳐 교육청에서 학교까지 뭔가가 하달된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남은 급식 반찬을 다 싸가지고 가며, 낡은 책상과 의자 때문에 학습에 지장이 있고, 학급 인원이 많아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는 글이었다. 함께 아이들과 글을 쓴 강사는, 당시에 환타지 소설 두권을 출간한 작가였고, 내용은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살아남는 아이들에 관한 거였다.
복지부동한 교육청과 학교 시스템상, 아주 골아픈 일이 생긴 거였다.
그리고 그날 마침 다단계에 빠진 교사 두명이 아이들의 교육비를 갖고 튀었고, 건물주는 임대료 협상을 하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렇게 학원을 운영하며 시름시름 영혼을 한줌씩 강탈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럭키는 엄밀히 말하면 언니의 개였다.
어느날 밤 버스에 치일 뻔한 개를 자신이 구했다며, 가족들을 모아놓고 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이름을 '럭키'로 지었다.
"버스 기사랑 다 같이 소리를 깩! 질렀다니까."
언니는 버스에 내려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개를 싸안고, 걸어서 집까지 왔다고 했다.
개는 목줄이 없었다. 말티즈와 푸들이 섞인, 믹스견이었다. 눈이 맑고 코가 동그랗고 이빨도 깨끗했다. 혹시 잃어버린 주인이 개를 찾아 한참을 헤맸을 거 같아 병원에 신고를 해놨지만, 소식은 없었다. 특히 조카와 딸이 럭키를 좋아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이 집 저 집에 훈풍이 불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딸은 럭키를 한번 안아보려고 매일이 눈물바람이었다. 해서 영어 공부방을 하던 언니는 급기야 럭키를 우리 집에 보냈다.
그래서 럭키는 우리와 살게 됐다.
우리 집 사정이라면...... 남편이 서른을 넘겨대학교에 재입학한 터라, 나는 생업전선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돈을 버는 중이었다.
논술학원을 운영하며 좌충우돌 강사들과 주변의 갖은 민원을 해결했고, 늦게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계절이 가는 것도, 아이가 커가는 것도, 개가 언젠가부터 우리와함께 사는 것도 잊고 살 정도로 경주마가 돼가고 있었다.
육아는 엄마의 몫이었다.
밤늦게 집에 오면 양말도 벗지 못하고 쓰러져 자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외투를 입은 채로 잠들었고 아침엔 다시 그 옷을 입고 나갔다. 눈을 감고 이빨을 닦고 있으면 엄마는 내 등뒤에서 '이런 개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럭키가 우리와 함께 산다는 걸, 종종 잊어서 욕실에서 나오다가 그 앞에 앉아 있는 개를 보고는 번번이 깜짝 놀라곤 했다.
좀비보다 못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뇌가 살아 있으니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불행이라는 비단뱀이 몸을 꽁꽁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압박감으로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고, 조용한 중에도 과호흡이 찾아왔다. 과호흡이 오면 마약중독자처럼, 편의점을 기어가 까스명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가출한 영혼이 매일매일을 관객의 입장에서 ,'나'의 육체를쯧쯧거리며 바라보는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용수철이 튀어 오르는 날엔 갑자기 고속터미널에서 가장 빠른 시간대의 아무 버스나 집어타고 떠나기도 했다. 한 번은 원주역에서 내렸는데, 역사 안 벤치의자에 노인 대여섯 명이 고장 난 티비를 입을 벌리고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나도 잠시 티비를 같이 바라봤는데, 노인중 하나가 내게 삶은 계란 한 개를 건네줬다.
"여기 무슨 일로 왔노?"
노인이 내게 무심히 물었다.
갑자기 난 내 신세를 한탄하고 싶은 맘이 들었지만
"바람 쐬러 왔어요"
라고 말했다.
바람은 바닷가 가서 쐬야지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하면서 다시 티비를 바라봤다.
편의점에서 산 콜라를 들고역 근처를 한 시간 정도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서울행버스를 타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기사식당에 들어가는 게 코스였다. 그곳에서 난 퍼런점퍼에 회사이름이 찍힌 사내들 옆에서 국밥을 먹고 같이6시내 고향을 함께 보기도 했다. 왜 리포터들의 목소리는 저렇게 과장된 것인가. 대체 국밥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곤 지하상가에서 만원에 다섯장하는 아이 팬티를 샀고, 꽃가게 앞에서 플라스틱통에 들어있는 하얀 국화다발을 쳐다보다가, 주인이 뭘 찾냐고 물어보면, 그냥 본거예요,라며 엉거주춤 돌아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 북새통이었던 지하상가와 러시아워, 행선지가 있는 사람들 사이 길을 잃은 거 같은 막막함이 있었고.
또 가끔은 학원정류장에서 열 정거장쯤 더 지나쳐, 모르는 정류장에 내렸다. 그리곤 아무 골목이나 술 취한 사람처럼 휘적휘적걷다가 남의 집대문에 적힌 문패의 한자를 읽으려고 가만히 서있기도 했는데, 이름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한참을 더듬으며 서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살아는 있는데, 효용가치를 다해, 방부제라도 털어 넣어야 앞으로 뒤로 옆으로 걸어가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는, 좀머 씨에게 호두지팡이라도 잠시 빌려 의지하고 싶었던 한 때가 분명히 있었다.
내 정신건강을 담보로 학원은 번창했다.
다단계에 빠져 돈을 들고 날랐던 강사 두 명은, 선처를 호소하며 다시 나타났고, 갑자기 여행을떠나게 됐다며 수업을 펑크 냈던 강사는 터키 차이쿠르를 사들고 출근하며 두통에 좋은 차니 자주 드시라 청했다.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던 강사는 일이 잠잠해지면 나온다고 휴가를 냈다가 이른 새벽 갑자기자신의 소설에 누군가 악플을 단다며 내게짜증을 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피해를 본 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책임 질 거냐며 매일 오전 9시에 전화를 걸어 나를 달달 볶았는데, 내가 파리처럼 싹싹 비는 시늉을 육성으로 전달한 효과가 있었던지,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밖에도 학부모들이 공공연히 수행평가를 해달라고 조르거나, 친인척의 승진심사 자소서를 비롯해 글로 쓸 수 있는 모든 양식들을 들고 왔고, 교육비 영수증을 부풀려 달라거나 어떤 날은 상담을 빙자해, 권태기에 빠져든 부부간의 은밀한 상담까지 내게 털어놓고자 했다.
그나마 건물주는 다크서클을 질질 끌고 다니는 원장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세금계산서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임대료 인상을 미뤄줬다.
일이 그런대로 해결됐다 싶으면, 강사들끼리도 패가 갈려 어떤 날은 서로 바득바득 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산 넘어 산이구나 싶었던 내 삼십 대의 먹구름이여.
그러니까 나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곤두서있는 상태였다.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되돌아갈 수도 없는 열패감에 시달렸다.
나는 꿈속에서도 어떤 서류를 들고 관공서를 찾아다니거나, 결번인 번호를 들고 계속 전화를 걸며 발을 동동거렸다. 버스는 오지 않고 운동화 끈은 자꾸 풀려리는데 설상가상 오줌이 마렵고, 그런데 화장실은 없고 저 멀리 버스는 오고 있는데 운동화 끈이 제대로 묶이질 않는다.
이 꿈들은 너무 자주 등장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이며, 십수 년이 흐른 뒤에까지 가끔씩 찾아오는 레퍼토리다.
밥벌이의 고단함은
누가 내게 시킨 것도 아닌데, 불운하고 노쇠한가족을 위해 메피스토와 흥정을 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달려왔던 나 자신에게 있었다. 어쩌면 내가 언제든 달릴 준비를 하며 바투 운동화 끈을 매고 있었기에, 그들은 드러누울 자세가 이미 되어 있었을까.
친정 가족 모두는 알콜릭 계보를 이루며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듯, 내 인생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지난날의 망령이 긴 망토를 두르고 나타나, 운동화 끈을 매고 있는 나를 향해 '니가 뛰어봤자 벼룩이지'라며 조롱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평생 일만 하다가, 어느 날 길에 쓰러져 폐지를 줍던 노인들에게 발견되는 상상을 종종 했다.
남들처럼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과외가 있는 날은, 새벽 한 시가 넘어 들어오기도 했다.
현관문을 열고 살그머니 들어가면 잠들었던 럭키가 눈을 뜨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컴퓨터 방에 들어가, 슈퍼에서 사 온 청하 한 병을 병째로 쿨렁쿨렁 마셨다. 기분 탓인지 이십 대 이후 처음 마시는 술이었는데, 어항물에 유통기한 지난 사카린을 섞은 맛이었다.
그리곤 마지막 남은 집문서를 사채업자에게 넘긴 빚쟁이마냥 문짝을 등지고 앉아 구부정히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처럼'을 봤다.
윤슬 위에, 형과 아버지와 폴은 낚싯대를 드리운다. 그들은 송어낚시를 하며 다시없을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도박에 빠졌던 폴이 죽는다.
나는 반짝이는 윤슬과 폴의 플라잉 낚싯대가 허공에나선형으로 감겨 올라가는 그장면에 멈춤 버튼을 눌러놓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다시 재생.
목사였던 아버지가 "완전히 이해는 못해도 완벽한 사랑은 할 수 있다"는 마지막 설교를 할 때, 나는 맘의 소요가 가라앉는걸 느꼈다. 그건 뭐랄까. 인생사 새옹지마란 주제에서 오는 안식 같은 거였을까. 행복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이란 명제를 되새기고 싶었던 걸까.아니면 내게도 한때 있었던 그 가족간의 정겨움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때마다 럭키는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지켜봤는데, 쥐어줄 안주거리 하나 없는 주인인데도럭키는 그냥 내 옆에 와있었다.
나는 간혹 울었다.
한 번은 개를 꼭 끌어안고 등짝에 얼굴을 묻었는데,
오래된 담요냄새가 나서, 울면서도 얘를 좀 씻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나.층간소음이 심한아파트라 새벽에 울음소리가 새나가면 어쩌지, 그러면서 털속에 얼굴을 묻고 소심하게 울었던 기억.
눈물과 콧물이 엉킨 얼굴을, 럭키는 바라만 봤다.
"사는 게 다 그래요 주인님"
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살아봤자 좋은 일이 있을까.
내 눈물은 그런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1999년 나는 제주에 있었다.
시나리오를 썼고, 큰 성과가 있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는 목숨을 걸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생계 때문에 놔버려야 했던 그 일이, 내 우울함의 기저였다.
비가 왔다.
새벽이었고, 나는 럭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우산을 쓰려다가 말았다.
럭키는 나를 잘 따라왔다. 우리는 노란 백열등의 포장마차를 지나고, 비닐막이 쳐진 방둑을 지나고, 새로 조성됐다는 나지막하고 비쩍 마른나무들이 듬성듬성 난 산책로를 지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굵어졌는데, 뭔 상관이냐 싶었다.
취객이 내 어깨를 세게 치고 갔는데도, 괜찮았다.
럭키는 제법 추운데도 내색 없이 내 보폭대로 걸었다.
녀석의 정수리에 빗물이 떨어지고 내 안경에 빗물이 고였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흐릿한 안경 너머 폴의 윤슬처럼 보였다.
준공업지역인 난전 같은 동네가 마치 1900년대 몬테나처럼 느껴진 건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럭키는 우리 집에 가장 오래 머문 개다.
사진 어디에나 럭키가 있는데 그곳에 나는 없다.
사진 속 럭키는 잠든 아이옆에 있고, 배드민턴을 치던 엄마와 함께 있고, 젖병을 물고 있는 아기의 침대아래에 있고, 그림일기를 쓰는 큰애의 필통에 발을 올리고 있다. 놀이동산에도 갔었는지 붉고 노란 화단의 보도블록 위에 위태롭게 서있기도 했다.둘째 아이의 장난감 밴 화물칸에 있기도 하고 집 앞 초등학교 놀이터의 시소 위에도 앉아
있다.
초등고학년이던 첫째 아이의 서랍에는 럭키에게 써놓은 편지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툭 떨어졌다.
그 연서는, 무척 깊은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 '럭키에게'라는 제목만 없다면 대체, 어떤 대상이 이런 사랑을 받았는가그들에겐 대체 어떤 추억이 있었는가, 몹시 궁금해질 만한 묵직함이 있었다.
이처럼 내가 모르는 시간과 장소에 럭키는 꾸준히 내 가족과 함께있었다.
나는 서너 번 럭키를 데리고 새벽에 산책을 나갔고, 같이 영화를 봤고, 그게 다다.
그리고 나는 객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다시 숨 가쁘게 달렸고, 그새 럭키는늙고 병들어엄마가 있는시골로 잠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