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2008년 뒤늦게 수의사가 됐다. 그리고 우린 어렵게 대출을 받아 병원을 오픈했다.
다시 나는 보릿 고개를 넘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나가야만 했다. 끝이 없는 고난의 행군.
어쨌든 우린 병원을 서울 한복판에 떡하니 오픈을 했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말일이면, 이자 계산에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미치지 않고서, 우리는 그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고 왜 뉴질랜드에서 제주까지 내려갔으며, 나는 왜 주제도 모르고 글을 쓴다고 설쳤으며, 왜 그런 우리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나. 곤두설 때면, 이런 자책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주변 사람 탓을 했고, 그건 결혼식을 올리고 두 달만에 뉴질랜드 목조학교에 들어간 남편에게까지 화살이 박혔다.
남편은, 정보기관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두달만에, 목수가 꿈이라며,IMF 다음해 봄 뉴질랜드로 갔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모두, 내가 벌인 일이었다.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나는 호기롭게 말했고, 남편은 그렇게 뉴질랜드로 목수가 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우린, 빈털털이가 됐다.
우린 병원을 오픈한 그즈음에도 럭키를 키우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강아지를 키운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거의 육아와 럭키는 엄마 차지였다. 제대로 생활비도 드리지 못하면서, 엄마의 등골을 빼서 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순수하고 곧이 곧대로인 사람이라, 가까이 지켜보니 수의사란 직업이 천직이었다.
다행히, 병원은 남편의 진실하고 학구적인 태도 때문이었는지,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는 있었다.
병원을 오픈하고 몇년이 지나, 하루는 분양업자가 병원에 들러 개 한 마리를 놓고 갔다.
남양주 어느 농장에서 태어나 분양됐다가, 장애가 있어 파양 된 강아지라고 했다.
그는 간질이 있고 건강이 안 좋은 개라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안락사밖에 방법이 없을 거 같다며 남편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남편은 그래도 치료나 한번 해보자며 강아지를 맡았다.
비쩍 마른 애를 한 달 정도 약을 먹이고 잘 케어하니, 수면 중에만 간질증상이 나타났다.다만 고개를 24시간 내내 딸꾹질하듯이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고, 똑바로 걷지 못하는 증상은 그대로였다. 녀석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불편한 증상을 지닌 채로 살아남았다. 뿐더러 대소변도 잘 가리고, 붙임성이 좋아 매니저와 손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병원에 오는 보호자들은 종일 머리를 흔드는, 이 아픈 강아지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사연을 물어왔고 손님들은 누구나에게 머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이 애를 예의 바르고 인사 잘하는 강아지라며 좋아했다.
너는 정말 예의가 바르구나!, 그래서 이름이 '딸꾹이'가 됐다.
딸꾹이는 가끔 보호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그 옆에 가서 더 심하게 머리를 흔들며빤히 쳐다보곤 했는데 그건 마치
"딸꾹이 아직여기 있어요"라는
무언의 호소 같았다.
"아이고, 아직도 여기 있구나, 에구 불쌍해라."
"딸꾹이 언제까지 여기서 키우실 건가요?"
같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손님들은 딸꾹이 때문에 병원에 온기가 돈다며, '안녕하세요, 마스코트'라며 귀여워했다.
딸꾹이는 오후 8시가 되면,자기 집의 문고리를 발로 열고 들어가 닫았다. 손님들도 거의 떠날 시간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타 힘들었을까.8시 즈음 집으로 들어갈 때는 '만지지 마시오, 개조심' 이런 쏴한 기운을 뿜었는데, 어쩌면 불편한 잠자리를 앞두고 예민해진 탓인지도 몰랐다.
저 딸깍딸깍 흔들리는 머리를 잠잘 때 만이라도 고정시켜 줄 방법은 없을까, 그런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맘 뿐이었고 나는 개보다도, 말일에 내야하는 세금 고지서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내 우뇌는 먹고 사는일에 대한 환멸과 좌절이, 좌뇌는 매일 곱하고 더하고 빼고 나누는 일에 풀가동중이라, 그것들이 과부화를 일으키면 곧잘 이방에 들어가서는 "어, 여기 왜왔지?" 저방에 들어가서는 "어, 여긴 또 왜온거야?" 이 지경이 돼버렸다. 증상이 심해져 mri 촬영도 했지만 의사는 "치매는 아니시고요"라고 말을 해줘, 허청허청 병원을 걸어나왔던 시절.
어쨌든, 분양 전에는 개농장의 좁은 케이지에서 살다가, 장애 때문에 한번 파양이 되고,안락사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여전히제 진짜 집을 찾지 못한 딸국이는 그나마 오가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사하는 강아지. 그리고 배웅하는 강아지로 인기몰이를 했다.
다른동네로 멀리 이사 갔다가 일부러 딸꾹이를 보러 오는 손님들로 여럿이었다.
"어머나! 딸꾹아!"
안아주고 얼굴을 비비고 안부를 물었지만, 그들은 모두 안타까운 얼굴로 그렇게 돌아갔고, 딸꾹이는 꼬리를 흔들며 멀뚱멀뚱 배웅했다.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지내거나 매니저가 데리고 갔고 평일에는 병원 셀럽으로 대접받으며 그렇게 병원 상주견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는데.
그런 딸꾹이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딸꾹이가 뒷다리와 무릎관절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게 된 것이었다.
병명은 '양측 슬개골 내측 탈구'였고 3등급이었다.
남편은 수술은 잘 됐지만, 낫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물론이고 재활하기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병원은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내게 얘기했다.
내 위기는 '번아웃'과 엄마의 귀향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 일을 하지 않는 날에도 우뇌와 좌뇌가 나를 달달 볶았다. 뭔가 해결해야할 일이 많은데 정리가 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고, 동네를 배회했고, 잠든 럭키를 잡고 울고, 그러다가 가방을 열고 그날 입금된 회비를 손에 침을 묻혀가며 세었다. "어, 오만원이 비는데. 이거 어디갔지", 그러면서 또 돈을 찾아 헤매고, "어, 영수증이 없네, 이거 어디갔지." 뜬금없이 영수증을 찾으러 냉장고를 열었다 닫고, 욕실 선반을 뒤지고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가방을 벽에 던지고 베개에 가만히 얼굴을 묻기도 했던 그 밤.밤.밤들.
딸꾹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키운다고 해도, 밤늦게 일하고 들어오는 나나 남편이나, 혼자 딸꾹이를 집에 그냥 놔둬야 하는 환경은, 병원에 있는 것만 못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더는 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참에 외숙모가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엄마가 급하게 외삼촌이 살고 있는 옛 친정으로 내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엄마가 딸꾹이를 자신이 키워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한밤중에 아이들과 사발면을 말아 먹고 있는데, 엄마는 딸꾹이를 데리고 오라며, 그리고 '이제 니 애들은 니가 키우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 딸국이를 데리고광천으로내려가게 되었다.
이미 시골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었다.30킬로 믹스견 자두와, 바둑이.바둑이는 감나무아래 긴 목줄을 한채 묶여있었고 자두는 건너편 은행나무아래 덩치 두 배만 한 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딸꾹이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데 시골개 자두와 바둑이가 집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와 서울개 딸꾹이를 향해 맹렬히 짖어댔다. 순한 자두가 컹컹 한두 번 짖고 마는데 비해 바둑이는 제밥그릇을 뒤엎으면서까지 딸꾹이에게 눈으로는 레이저를 쏘고 코를 흘리고 입이 마를 때까지 깡깡깽깽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딸꾹이는 이 거친 애들은 대체 왜 이리 난리발광인 건가 놀라서 바들바들 떠는 거 같았다.
그러곤 딸꾹이는 그날부터유일하게 거실 생활을 하게 됐는데, 엄마는하루에 30분 정도 날이 선선해질 때, 천천히 동네를 산책하며 딸꾹이의 다리 힘을 길러주겠다고 내게 약속을 했다. 그리고 자두와 바둑이가 딸꾹이를 시샘하는 거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특히 바둑이가 그날부터 밥을 먹지 않고 집에 들어가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다나.
서울 한복판 고층 건물들 사이자리한 동물병원의 나름 인기견에서 갑자기 너무 한적해져 버린, 사방이 조용하고 가끔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가 전부인 이 적적한 환경에 어리벙벙할 줄 알았던 서울 개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쌩쌩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꾹이는 순식간에 적응했다. 밤에 종종 발작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똑바로 걸었고 머리를 흔드는 증상도 많이 호전이 됐다. 머리를 흔들지 않고 드는 잠은 얼마나 꿀맛일 것인가. 녀석은 시골에 내려가 어떤 마음의 안식을 얻었길래, 잠자리가 편안해졌을까.
엄마의 거실풍경은 멀리 기찻길이 보이고 한 시간에 두 번 기차 지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는, 그런 평화로운 곳이었다. 돌고 돌아 이곳에 오려고 딸꾹이는 그 고생을 했던가 보았다. 너라도, 행복하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가을 들판 하얀 마시멜로 사일리지가 군데군데 있고 구름은 흘러가고 바람이 불고 그곳에 딸꾹이가 달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귀가 뒤로 홀랑 넘어가 귀의 빨간 속살이 보이는, 그리고 다리가 바닥에서 붕뜬거 같은 찰나의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이 날을 위해 이제껏 딸꾹이는 버텨왔는가, 싶었다.
두 달 만에 내려가서 마주한 딸꾹이는 영락없는 시골개가 돼 있었다. 털도 엄마가 가위로 잘라줬는지 단발머리 스타일로, 옛날 광천 역사내 건달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자두와 바둑이의 집에 들어갔다 나왔다, 아이들과 꼬리를 물고 당기고 뒤엉켜 같은 배에서 나온 개들처럼 물고 빨며 놀고 있었다.
잠시 남편과 볼일을 보고와 현관문을 드르륵 열었는데,
소파에 앉은 엄마는 목을 뒤로 꺾은채 코를 골고있었고, 엄마의 무릎에 누운 딸꾹이는 몸을 쭉 펴고 있어 다리가 대롱거렸는데, 빛이 소파를 타고 딸꾹이의 얼굴에 닿아서 그랬는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양새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나를 이곳에 그냥 놔둬유, 그런 능청스런 압력처럼 여겨졌다.
너 이 녀석,드디어 제대로 집을 찾았구나.
어느 날 앞집 사는 아줌마가, 엄마가 키우는 닭이 새벽이 아닌 다른 때에도 울어댄다며 난리를 피워, 닭을 당장 잡으라고 호미를 들고 나타났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딸꾹이가 내려온 후로는 개의 목줄이 풀려, 자기 밭을 헤집어 논 범인이라며 아침 댓바람부터, 현관을 두드리고 소리소리를 질렀다고 내게 전해왔다. 염병할, 무슨 거실에서 개를 키워 키우기를. 그렇게 욕을 했는데, 딸꾹이는 아줌마를 향해 맘 좋게도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고 했다.
딸꾹이의 건강한 기운은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가 준 생옥수수를 두 발로 잡고 야무지게 베어 먹는 모습은 정말 희귀하고 웃겨서 동영상으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옥수수 먹는 강아지라며 보내줘 아주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오랜 호시절을 지냈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며, 저녁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나갔고 잠을 푹 잤으며 마당을 뛰어다녔고, 정말 내 집을 찾아서 문패 달고 들어간 기분으로 살았던 딸꾹이.
그런 딸국이에게 다시 먹구름이 밀려왔다.
엄마가 척추에 문제가 생겨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 잠시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주인은 서울에 가있고 외삼촌마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가 시골에 내려가더라도 허리를 굽힐 수 없으니, 딸꾹이를 돌보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나는 혼자 엄마를 케어하느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사는 건 정말 산넘어 산이구나. 누가 어렸을 적 알려줬더라면 그때 생산적으로 인생을 포기해버리는 건데, 너무 멀게 와서 포기할 수도 없구나, 그런 막돼먹은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설상가상, 딸꾹이도 함께 디스크가 발병한 것이었다.
배변과 배뇨가 안되고, 종일 누워있는 거 말고는 되는 게 없는, 마비가 심해 수술을 해도 후유증이 남을 것이었다. 그나마 약물치료를 해 경미하게 호전된 시점에, 대구에 사는 사촌언니가 나섰다.
내가 해볼게, 그러면서 언니는 대구에서 풀액셀레이터를 밟고 자정 넘은 시간에 도착해, 배변판 위에 24시간 누워있는 딸꾹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다. 그 집엔 이미 3마리의 개가 있었다.
그렇게 10년 전 안락사 위기를 넘기고 되살아난 딸꾹이는 노후를 대구에서 보내게됐다.
보조기를 달고, 약을 먹고, 관장을 해가며 정성으로 돌본 결과, 보조기를 의지하지만 거실을 돌아다니고 가끔은 보조기 없이 서너 발짝을 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언니는, 딸꾹이의 동영상을 내게 보내왔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장애견에게는 바로 안락사하지 않고 아직 세상물 덜먹은 수의사에게 데려온 분양업자와 그리고 엄마와 대구언니, 그리고 미력이나마 먹고 사는 일에 허우적대다가, 투덜거리며 딸꾹이를 가여워했던 나까지.
우리가 온마을이었던 셈인가. 그렇다면 내게도 그런 마을이 있었나.
내 15살 동생을 충청도 홍성에서 화장하고 돌아온날, 밤이었다.
엄마는 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쿨피스 두병을 사 오라고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어제와 똑같은 달빛, 습한 공기, 모든 게 변하게 없던 그 날밤을,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가서 키가 전봇대처럼 크고 숀코네리처검 생겼던 정우 수퍼 아저씨에게 퉁퉁 부은 눈으로 쿨피스두병을 외상으로 갖고 갈수있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내게 냉장고에서 꺼내온 쿨피스두병을 비닐봉지에 넣어주며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건 아저씨가 그냥 주는 거야
잘살아라',라고 말했다. 잘 가라, 하지 않고 잘살아라.
숀코네리는 땅콩 닮은 아줌마에게 쥐어 살았지만, 사랑 받았으리라.
우린, 나름 자리를 잡았고 이제 내 우뇌와 좌뇌는 잘 협동해서 사는 법을 익혔다.
내 성실하고 정직한 남편은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동물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나는 내게 이런 시간이 올 줄 몰랐다. 그건 모든 인연의 연속성 때문일 거라 믿는다. 동물과 사람의 일 모두에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