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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Oct 08. 2024

떡국이의 밥그릇

나는, 괜찮다.

"그냥 신경정신과 가세요"

의사가 말했다.


인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뇨기과였다.  병원은 대기가 많아 두 시간씩 기다려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유명 비뇨기과에는, 특히 남성 노인환자들이 많았고, 나는 그들 사이에 꼽사리 끼어 앉아 있었는데, 노인들은 나를 자주 흘끔거렸다. 가래를 웅얼거리거나, 헛기침을  두세 명이 모이면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내뱉기도 했는데, 그들이 메고 있는 가방에는 성조기와 무궁화, 태극기 배지가 달려 있었다.


내 방광염의 발발과 더불어 대통령이 탄핵됐고, 태극기 집회에 무리 지어 다니는 노인들을 나는 비뇨기과에서 만났다. 진찰실에서 바지춤을 잡고 나오는 노인이 화장실에 들러 컵에 노란 거품 낀 오줌을 가득 들고 나오면, 간호사는 버럭, 할아버지 왜 이렇게 오줌을 많이 담아 오셨어요!라고 큰소리를 내기도 했다. 나는 그 컵에 그득 담긴 오줌을 싸는, 노인에게 화가 났다.

그건.....

튼튼한 방광에 관한 시샘이었다.



나는 우울증에 쩔어 있었다.

핏발 선 방광을 지닌 채, 반년째 미용실도 가지 않은 푸석한 머리털과 검은 고무줄 츄리닝, 수개월째 두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하는 초기 갱년기 좀비였다.

내 이끼 낀, 소심한 악다구니에 선생님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진료과 자체를 바꾸라고 권해온 것이었다. 물론 알프람정 같은 약은 이미 초반부터 함께 투약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그 어떤 약도 내 방광을 달래지는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선생님, 저 안 낫는 거죠?" 

이미 내 뒤에는 바지춤을 잡고 섰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나는 남자의 바지춤을 바라보며, 쌩지옥이 따로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



밤에 한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변기를 부여잡고 나는 욕실 타일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신체 부위 중 이 '오줌보'라는 존재를 귀히 여기지 않은 죄, 나는 방광이라는 장기에 너무 무심했다.

마가 했던, 그 진부하기 짝이 없던 말들, 잘 먹고 자고 싸는 게, 최고 행복이라던 말. 나는 변기에 앉아 매일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세 가지를 다 잃었고.....


떡꾹이를 얻었다.



어느 날, 남편은 변기통을 잡고 사는 나를 위해,  

현관에서, 말티즈 한 마리를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녀석은 무척 작았고 그 단추 같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얘랑 공원 산책도 하고 바람 좀 쐬어봐"

그는 내 우울증을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떡꾹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초음파에서 내 방광은, 핏발이 서 있었다.

좀처럼 낫지 않았고, 상태가 심했다. 종양이 보인다고 해서 어렵사리 대학병원지 가보았지만 같은 소견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혹시 해결이 안 되면, 그냥 사시면 됩니다" 

학병원 의사는 눈도 마주치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 방광은, 강남에 있는 이 큰 병원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물건인가 보았다.


나는 대학병원을 다녀온 날, 방광염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있는가,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기도 했는데, 검색어의 모든 순위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관한 것뿐이었다. 


통증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방광에 아령을 매달아놓은 듯 바닥으로 뭔가가 물컹 쏟아져 내릴 거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잠깐 잠들었을 때만 통증이 멎었다. 깊은 잠을 못 자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똑바로 걷지 못하는 증상까지 생겨났다.



한편 동계올림픽은 남북단일팀으로 구성돼,  전국이 들썩였고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한복판이 될 거라는 흥분에 휩싸인 상태였다.  허나 나는 올림픽도 심드렁했다. 그 좋아하는 조조영화도 보지 못하고, 산책도 불가했으며, 내년쯤 정리하고 가려던 긴 여행일정 또한 다 허물어졌다. 남의 세상에서, 기웃거리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에선 또 내 방광만큼이나 폭발할 거 같은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건 사춘기 아들 녀석의 기행이었다.

그 순둥순둥하던 아이의 눈빛이 변하면서, 번번이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일들이 생겨나고, 그마저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둥, 일상이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었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의 눈물의 경기는, 잠시 통증을 잊게 해 줄 만큼의 감동을 주었지만, 그들만의 잔치 같은 외로움이 들었다.




 

떡꾹이는 여기저기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다녀서, 처음엔 이름을 토끼로 지었다가, 병원 상주견이었던 딸꾹이랑 운을 맞춰 떡꾹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주말에는 딸꾹이가 와있었는데 두 마리는, 서로 엉겨서 잘 놀았다. 그런데 나는 이 아령에 눌리는 이 몹쓸 방광을 안고 주말에도 수업을 하느라, 두 녀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떡꾹이를 받아들인 일 후회했다.  그런 한편 딸꾹이가 다리 수술을 하며 시골로 내려갔고, 집에는 떡꾹이만 남게 되었다.



나는 종말론에 심취한 사람처럼 몸에 좋다는 약을 찾아 헤맸다.

티비에서 광고하는, 산적 같은 아저씨가 들고 흔드는 남성 전립선 영양제인 쏘팔메토와 엄마가 들어준 강황, 잉카전사들이 전쟁 나가기 전에 먹었다는 정력증강제 마카까지, 병만 낫는다면 뱀도 잡아먹을 먹을 판이었다.


내 우울증은 세수를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는 상황까지 왔다. 지하철을 타면 슬슬 사람들이 내게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지 흠흠거리며 나를 피하는 거 같았다. 고3 큰애의 밥을 챙겨주지 못했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아 아이가 얼룩진 교복치마를 입고 학교를 갔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그게 지금  내 방광과 무슨 상관인가, 싶은 그 깊은 바닥까지 나는 추락한 상태였다.


뿐더러 둘째는 맹렬하게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옆 단지에서는 갱년기 아줌마가 사춘기 아들과 다투다가, 투신했다는 소식을 지인들이 물어 날랐을 때도, '맘은 편하겠네',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갑자기 후드집업을 뒤집어쓰고 블루투스이어폰을 끼면서 시작된 사춘기는, 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눈깔을 내리깔아서 어떨 땐 흰자위가 너무 많이 보여 깜짝 놀라기도 했고, 여자애들과 페이스북에서 노닥거리느라 학원을 빠졌고 교복셔츠를 풀어헤쳤으며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다. 그리고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이기도 했고 금방 지나갈 거라는 기대감을 뒤로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대꾸를 안 했고, 세상 멋진 척, 온통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아이들과 브루클린 갱스터인척 흐느적거리며 쏘다니는 꼬락서니를 바라보며, 어떤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아이의 멱살을 잡았고 우리 둘 사이를 떡꾹이가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이 새끼! 같이 죽자!"

그런데 나는 더 화를 내지못했다.


그놈의 방광 때문에.

 



떡꾹이를 나는 그냥 거실에 놔뒀다. 밥을 주고 물을 줄 뿐, 뭘 해줄 수가 없었다.

집안의 우울한 그림자를 나 몰라라, 떡꾹이는 사방팔방 깡총이며 뛰어다녔다.


너무 작은, 아이는 슬리퍼에 눕거나 신발장 앞 신발 속에 들어가 잠이 들기도 해서, 나는 여러 번 기을 했다. 그걸 못 보고 밟아서 죽일 뻔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신발을 신을 때면 얘가 있나 없나 살펴야만 했다. 

아, 너는 참으로 귀찮구나.

그게 내 솔직한 맘이었다.


나는 아파트 단지 카페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있는 힘을 쥐어짜 떡꾹이의 목줄을 잡고 가만히 유령처럼 멀뚱히.


눈이 녹고 이제 봄이 오려는 듯 찬 공기가 사그라드는, 산세 그윽한 아파트의 벤치에 앉멍하니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권태롭고 힘든 일이었다. 뭐랄까, 수명을 다한 필라민트가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고 있는 애처로움이랄까.

나는 생전처음 경험하는, 이 무기력과 권태가 너무 무서웠다.


나는 떡꾹이의 목줄을 쥐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지를 자기 키만큼 쌓아 올린 리어카를 끌고 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벤치옆에 리어카를 세웠다. 노인은  보온병에 있는 물로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한개 털어넣고 휘휘 저었다. 그러곤, 딱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뽀얗게 올라오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커피를 호록 호록 마셨고 나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내가 혀를 달싹거려서, 노인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었나. 영차영차 다시 리어카를 끌고 사라질때 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저 씩씩한 다리와, 그리고 겨울이 지나는 서늘한 햇살 아래 드러난 주름진 까만 얼굴이, 영차영차의 근성이, 커피를 마셔도 오줌을 한 컵 씩 내려주는 그 '방광'이 부러웠을까.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뭉근한 게 떡꾹이 정수리에 떨어졌을까,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휘성엄마, 빨리 좀 와봐. 애가 다쳤어. 얼른 와 얼른"

이건 무슨 소리인가.

 

가보니, 아이는 피를 흥건히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찌그러진 자전거와 차 두대의 후방 라이트가 부서져있고 아이가 그 차에 기대 있었다. 아침에 말고 나간 앞머리가, 숨 죽은 배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아, 제발, 싸가지가 오백 년 없어도 되니 죽지만 말아다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 아이가 갑자기 파르르 떨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119가 도착했다. 나는 아이에게 정신이 드냐고 물었다. 아이는 눈을 뜨려고 했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119 대원들은 아이를 보더니, 이마가 많이 찢어졌고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거 같다며 괜찮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병원에 도착해 여러 검사를 했고, 밤이 되어서야 아이는 이마를 봉합하고 나왔다.


나는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다.

아이도, 주먹만한 떡꾹이도. 내 자신도.


뭔가가 잘못된 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공포에 관한 것이었다.





어쩌면 방광은 핑계였을까.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다음 날 그냥 집에 놔둔 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리고 매일 지나는 길목에 있던 y한의원을 걸어 올라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나는 한의원을 신뢰하지 않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오셨을까요?"

"사실은 신경정신과를 가야 하는데, 그냥 어떻게 여기를 오게 됐네요."

"음.. 디가 가장 불편하실까요?"

"방광이요"

그러면서 나는 일 년 가까이 된 내 증상과, 아이의 사춘기와 제의 사고, 그리고 알콜중독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 언니의 케어를 담당하고 있는 내 형편까지 의사에게 얘기했다. 나는 그곳이 한의원인지 알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의사는 내 얘기를 끊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들어주었다. 나는 눈물보다 콧물이 너무 많이 나와 옷소매로 닦았는데, 의사는 그때마다 계속 티슈뽑아 내 앞에 놔주었다.


"아, 그러시군요. 정말 방광도 아프시고 맘도 아프신 거 맞네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사람에겐 회복능력이란 게 있어요. 그리고 이건 아이들 사춘기와 같은 거예요. 갱년기 전조증상일 수도 있는데, 지나갑니다. 다 지나가요, 제 말을 믿어보세요."


다 지나갑니다, 제 말을 믿어보세요.


나는 물리치료실로 들어가 그 인자한 선생님이 찌르는 수십 개의 침을 머리통과 목덜미에 맞았다. 선생님은 머리통이 문제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머리통에 꽂은 그것은 피뢰침이었을까. 그것을 타고 좋은 기운이 내 뇌를 맑게 하고, 목덜미와 척추를 지나, 핏발 선 내 방광을 토닥토닥였을까. 그만하면 됐다, 이러면서.

나는 코를 골며 내처 잠이 들었다. 간호사는 내가 한 시간이나 잤고, 선생님이 그냥 놔두라고 해서 깨우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내 말이 거짓말 같겠지만, 나는 그 한의사를 만난 후, 방광염이 반쯤 나았다. 며칠 후 받아온 한약을 나는 몇 개 먹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먹었던 알프람정도 끊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 네 시간 정도는 일어나지 않고 잠을 잤다. 잠을 자니 방광 통증이 줄었다.



그리고 바로 일을 접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가세가 기울 거 같은 이상한 최면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고, 떡꾹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을 때는 샴푸를 듬뿍  거품을 뾰족한 버섯처럼  올리고, 움파룸파처럼 거울을 바라봤다. 자신을 위해서, 나는 위트를 발휘해 보기로, 그렇게 살아보자고, 생각을 했다.  



아이는 여전히 이마에 길쭉한 상처를 지닌 채 사춘기를 겪으며 나를 힘들게 했, 순간순간 멱살이 잡고 싶었지만, 나는 '다 지나간다'는 말을 믿었다.





우리는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동물병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나왔다. 학군지라, 이 또한 큰 도전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집에 갔는데, 떡꾹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다 보니 이곳저곳 구토의 흔적이 있었고, 소파 아래 숨어있는 떡꾹이를 발견했다. 애를 끌어내어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전날 아이가 먹고 모아놓은 고추바사삭 닭고기 뼈가 몽땅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쓰레기통에 들어갔다나온 아이는, 몰꼴이 말이아니었다.

떡꾹이는 그렇게,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살아돌아왔다.



닭뼈를 위장 가득 삼키고도 살아남은 개, 씻기를 싫어해 욕조에만 넣어놓으면 시큰둥해진 표정을 짓는 통에 모두를 웃기는 해학적인 개. 그리고 내가 만난 개들 중 유일하게 '눈물 젖은 빵'과 거리가 먼 금수저를 문 개.

병원은 적당히 자리가 잡혔고, 나도 일을 관두면서 떡꾹이와 나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녀석은 큰 개들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반면, 아기들을 만나면 꼬리를 치고 가서 애교를 떨었고, 고구마와 사과를 좋아하고, 전혀 대소변 실수가 없고, 최근에는 동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나는 이런 평범한 일들을 이제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드디어 떡꾹이를 키우며 진정한 '호시절'이 이런 것인가를 느끼는 중이다.

과거를 뒤적이며, 힘겹게 털어놓았던 내 아픈 시절과 함께 했던 개들 그리고 내 떠나간 가족들, 그 또한 괜찮다. 모든 일이 순리 안에 있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일들이다.


개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았던 '밥그릇'이 나는 힘겨웠는데, 그 또한 괜찮다.



현재, 이곳에, 내가 있다.

오늘도 떡꾹이의 밥그릇을 나는

조용히, 바라본다.


괜찮다.



( 덧붙여서, 6화연재 '개가 아니라 불사조'에 이어)

대구로 내려간 딸꾹이가 이렇게 좋아졌. 건강한 모습에 코끝이 찡 몇 번을 돌려봤다. 앞다리가 불완전하지만 이 정도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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