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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Apr 01. 2024

뭔가가 잘 안 풀리면 개조식으로 글을 써본다

생각의 변비약: 글쓰기

나는 뭔가 머릿속이 생각으로만 꽉 차있고 어떤 의미 있는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그러니까 생각의 변비에 시달릴 때면, 개조식으로 글을 써보곤 한다.

(개조식 : 글을 쓸 때에 글 앞에 번호를 붙여 가며 중요한 요점이나 단어를 나열하는 방식.)


요즘 나의 생각들을 나열하면 이러하다.




1.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제대로 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글이 나오지 않는다. 저장글만 늘어나는데, 저장글 어느 것 하나 끝맺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용두사미의 집합소.


2. 이렇게 3월을 보낼 수는 없어 모두가 잠든 방에서 나와 거실 스탠드를 작게 켜고 블루투스 키보드도 꺼냈다. 일단 생각을 번호를 매겨가며 써보자.


3. 어느 것 하나 잘 해내고 있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어느 것 하나 망해가고 있는 것 없는 나날들. 그런 일상을 하루하루 살고 있다.


4. 출근해서는 일하고 퇴근해서는 육아를 하는 삶은 아무리 적응했대 숨이 가쁘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삶의 복잡성이 커질수록 머릿속은 점차 흙탕물처럼 변해감을 느낀다. 뭔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계속 무언가가 내면에 쌓여만 가고 있다.


5. 일종의 변비다. 생각의 변비. 내 안에 생각이라던가, 질문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그게 정리가 되면서 적절하게 글로 배출이 되어야 되는데 그저 묵혀있다. 요즘 나는 무슨 생각들에 그리 휘둘릴까.


6. 아직도 가끔은 내가 직장이 아니라 집에 있는 게 맞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쌍둥이들이 아침에 눈도 못 뜨면서도 내가 나갈까 봐  양다리에 하나씩 매달려 학교 가지 말라고 울 때,

키즈노트에 찍힌 사진에 우리 만 머리가 산발로 등원한 모습을 볼 때,

준비물을 놓치고 안 보냈음을 알았을 때,

아이가 친구집에 초대받았는데 나만 아이혼자 덜렁 보냈을 때,


이런 순간, 순간들에 가슴속에서 뭔가 물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내가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의 물방울들이 보글보글 내 안에서 자꾸만 올라온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영영 모르면 어떡하지.


7. 그래놓고 직장에 가면 아이들 생각이 잘 안 날 정도로 학교일에 온 정신과 에너지를 쏟는다. 정신없이 하나씩 해 치우다 보면 어린이집 하원시간. 늘 뛰어야 하는 삶. 숨을 돌리며 느긋이 보내는 나 혼자만의 시공간은 없다.


8. 일도 좋고 아이들도 좋고. 그러나 모든 일이 으레 그렇듯 항상 좋기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일이 힘들고, 때로는 육아가 힘들고, 때로는 둘 다 힘든 날도 있다.  

그래, 좋아하지만 힘들 수 있다.

힘들지만 좋아할 수도 있다.

하기 싫지만 하고 싶기도 하고,

그만하고 싶지만 계속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모든 마음들이 다 동시에 들 수 도 있다.


9. 잘하려고 하면 꼭 탈이 난다. 3월은 특히. 그냥 해야 한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원대한 목표 세우지도 말고. 매사에 모든 것을 구멍 없이 완벽하게 하겠다는 계획은 애초에 세우지도 말아야 한다.


10. 그냥 한다. 매일 한다. 이거보다 더 오래 지속될 방법은 없다.



이쯤 되니 알겠다.


나는 다 잘하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잘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어정쩡함을 힘들어하는 거다.

 

그런데 어쩌면 이 모든 역할들을 해내고 있는 것은 내가 어정쩡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기도 하다.


어정쩡이 아니라, 융통성이 있는 상태. 때로는 얼음도 되고 때로는 수증기도 될 수 있는 그런 유연하고도 가능성이 풍부한 물 같은 상태.


어쩌면 이런 어정쩡함이 나를 AI 같은 걸로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의 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매일 쌓아가는 이 하루하루들이 먼 훗날 돌아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묵묵하게, 이 어정쩡함을 기반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좋아하는 시로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대추 한 알_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 알이 영글기 위해서도

무수히 많은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을 거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렴

일도 잘하고 싶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싶고
글쓰기도 계속하고 싶은 나는

못하는 것들도 많아지고
자괴감이 생길일들도 많아지고
힘 빠지는 일들도 많아진다.


그런데 그런 나날들이 있어야

그런 나날들이 지나가야

속이 꽉 찬 대추 한 알이 된다.


속을 채워가야지.


이 어정쩡함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야지.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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