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 셋을 키우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제 갓 6살, 4살, 4살이 된 고만고만한 삼 남매를 키우는 엄마니까, 힘든 이유는 최소 수백 가지는 숨도 쉬지 않고 줄줄 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힘든 이유들이 외부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러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원인들 때문이라면, 그럼 나는 온전히 '힘들어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니까 외부에서 오는 힘든 요인들이 있다면(자극) 나는 반드시 힘들어야만 하는 걸까(반응). 반대로 그럼 내가 행복하려면 이것도 외부적으로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어줘야만 가능한 걸까. 남편이 뭘 해줘야, 혹은 자식이 어떻게 해줘야, 로또가 되어야 나는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인가? 스스로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나의 삶에서 나라는 사람의 경계는 누가 정하는 걸까, 어디까지가 나의 영역이고, 어디서부터는 내가 아닌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무지막지하게 던지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행복을 느끼는 주체가 나니까. 고로 나의 행복을 책임질 사람도 나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나다. 정확히는 나의 행복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남편도 자식도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남편이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면 기쁘다. 그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 씻고 생활하니까. 그렇지만 그의 성공이 나의 성공인 것은 아니다. 그가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의 성취이다. 그가 돈을 더 벌어온다고 해서 나의 능력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똘똘하고 재능이 많으면 기쁘다. 어디를 가도 칭찬받고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아이의 삶이지 내 삶은 아니다. 아이의 성취가 나의 성취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의 자아는 남편이나 자식과는 구분된 다른 성취나 행복의 요인을 스스로 강구해야만 채워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경계가 흐려져서 남편의 성취나 아이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착각하는 순간 나를 잃게 된다.
그리고 경계를 잃고 나와 남이 구분이 안 되는 순간이 오면 자꾸만 원망의 화살을 밖으로 향하게 된다. 결국에는 주변의 상황에 나의 행복이 결정된다. 내 삶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내가 불평불만이 많다면 그만큼 환경과 주변인에 휘둘리고 있다는 얘기다. 내 얘기였다.
나의 주된 업무는 가족의 일상이 잘 굴러가게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잘 굴러가면 티가 안 나고 안 굴러가야 티가 난다. 구체적인 업무분장표란 애당초 있지도 않다. 아이들 셋이 건강하게 자라고 매일이 별 탈 없이 안정되게 굴러가게끔 하는 일. 일상이 잘 굴러가면 티가 안 나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티가 나고 업무는 과중된다. 그러나 이 일은 업무가 많다고 해서 항의를 하거나 성과급을 요구할 수도 없다.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버티는 것이 기본 전제다. 일상을 버티고 버텨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에 반해 남편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매달 돈을 벌어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온다는 것은 능력에 대해 더이상의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 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을 벌어오기 때문에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인정받는다. 그가 벌어오는 돈 때문에 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정확히는 일을 하러 나가는 순간 버는 비용보다 나가는 비용이 더 커지니까 그냥 일을 하지 않는 게 이득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것은 나도, 그도, 아이들도 모두가 원한 것이다. 내가 집에 있기를. 그리고 나도 그럴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과중을 느낄때마다 이것이 내가 원한 삶인가.라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남편을 보며 생각한다. 그저 밖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삶이란 어떨까.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가정에서도 존중받는 삶. 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의 성취가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의 능력이고 그의 성취다.
그는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로 인해 매 순간 행복하냐.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나는 가능한 범위에서만 그에게 내 업무를 나눈다. 우리는 꽤나 전통적인 방식의 양육을 하고 있다. 그의 주된 업무는 가정경제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버는 것. 그리고출근 전에 아침을 차리고 아이들 가방을 챙겨주고 퇴근해서는 황폐해진 집을 치우고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는 일 정도다.
하지만 나 또한 많은 일을 하기에그럼에도 남편처럼 경제적인 보상을 받거나 사회적 인정을 받는 일은 아니기에 업무가 많아지면 자동으로 불만과 불평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허무하다는 감정이 일상에서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그럴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그 불만의 화살이 가려고 하는 순간이 늘어날 때마다, 뭔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의 저항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나라는 사람의 경계는 내가 정한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의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될까.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남편의 성취를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의 성취를 내 것으로 여기며 쏟아붓는 것의 차이를 아는 것.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들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는 나만의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나의 행복을 다른 이에게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남편이 돈을 못 벌어도, 자식이 내가 원하는 만큼 성취를 하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존재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남편과 자식에게 쏟는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조절한다. 120%를 쏟아붓고 싶지만 일부러 80% 정도만 쏟아붓는다. 그렇게 그러모은 20%로는 온전히 나의 행복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욕구부터 채운다.
제대로 먹고 제대로 씻고 제대로 자는 것부터.
정성스럽게 마치 신생아를 다루듯 나 스스로를 먹이고 씻기고 입힌다.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가족이 남긴 걸 먹어치우지 않는다. 집에 있다고 잠옷만 입고 생활하지 않는다. 낮동안엔 깨끗하고 정갈한 옷을 입고 생활하고 잠들기전에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다음으로는 남편이나 아이와 관련이 없는 일, 생존에 꼭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을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책을 읽거나 밖으로 나가서 배회하며 멍 때리다온다. 시간과 에너지가 남는다고 방바닥을 한번 닦을걸 두 번 닦지 않는다.
그 에너지를 아껴뒀다가 스스로를 위한 일에 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의식해야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실망하거나 서운할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나의 행복까지는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행복의 원천이다. 원천에서 물을 끌어오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불교에서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돈오'라고 부른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점수'라고 불리는 수양을 통해 갈고닦아야만 진짜 내 것이 된다고 했다.
나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은 나다.라는 깨달음이 '돈오'라면, 나의 행복을 위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는 것은 '점수'가 된다.
글쓰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되는 나의 실험이다. 그저 되는대로 살지 않겠다고 쓰면서 다짐해 본다.
내일은 또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더라도 내 마음가짐만 바뀌면 나의 행복을 느끼는 촉수도 잘 깎은 연필처럼 예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