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이 되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인간.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이 매서워질수록 나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움직임이 느려지고 판단력이 미숙해지며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미성숙해진다. 작은 일에 쉽게 화가 나고 사소한 일도 버겁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날씨 탓이다. 고작 날씨 탓이라고? 나에게 날씨는 '고작'이 아니다. 절대적인 변수다.
그러니까 겨울이 되면 나는 겨울잠을 자야 하는 동물들처럼 몸이 느려진다. 해가 뜨지 않은 아침시간에는 눈을 뜨기 힘들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낮 시간에는 집 밖에 나가는 게 마치 강을 건너는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움직이지 않고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위장도 느려진다. 잘 챙겨 먹지 않고 커피나 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점점 기력이 달린다. 기력이 달리면서 루틴이 무너졌다. 기계로 따진다면 겨울이 되면 기름을 똑같이 넣어도 느려지는 기계처럼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계가 되는 거다. 나는 봄여름가을의 효율성의 70% 정도로 겨울을 난다. 30%는 체온 유지와 동면과 비슷한 가수면상태로 멍 때리는데 쓴다. 스스로 이런 자신이 한심했는데 데카르트의 일화를 보고 위로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말년에 스웨덴의 여왕이 스승으로 초청하자 자신은 추운 지역에 가면 머리가 안 굴러가서 거절했다고 한다. 여러 번의 간곡한 부탁 끝에 결국 스웨덴에 가서도 추운 날씨와 이른 시각에 하는 강의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렸다고 한다. 추우면 생각이 잘 안 되는 것은 데카르트 같은 천재에게도 마찬가지였다니 위로가 되었다. 게으른 게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거다.
2. 이불속 나태지옥
차라리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있으면 되겠지만 추우면 이불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다. 겨울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때에는 정말이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첫 직장이 서울의 북동부 끝자락으로 춥기로 유명한 지역이라 그런지 사무실에서도 입김이 느껴질 정도였다. 열악한 지역에서의 겨울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뇌마저도 냉동시키는듯하다. 잘 굴러가지 않는다. 생각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미래를 예측하거나 계획을 세워 실행시키는 능력은 퇴화하고 짧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만 하는 거다. 휴직을 한 지금은 아이들 등하원을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있는데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행인데, 다행이기만 하진 않다. 사람에게도 관성이란 게 있어서 움직이다 보면 계속 움직이게 되고, 안 움직이고 집에만 있으면 계속 집에만 있게 된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가뜩이나 햇빛이 짧은 계절에 집에만 있다 보면 점점 더 햇빛을 못 받게 된다. 억지로라도 나가야 하는데 억지를 부릴 이유가 없어지는 거도 문제였다.
3.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자각
이불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스마트폰뿐이다. 보고 있을 때는 굉장히 흥미롭고 중요한 정보 같지만, 안 본다고 전혀 지장이 없는 그런 것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지는 않은 정보들 그런 가상의 공간에서 유용해 보이는 거라곤 보이는 족족 눈에 담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있었다. 오늘도 하루를 대충 보냈다는 자괴감. 내일이라고 뭐가 달라질까? 그렇게 겨울을 보내다 보면 자기혐오에 이른다. 새해가 가까워올수록 이렇게 일 년을 마무리하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자꾸만 든다. 이렇게 보내다가는 새해라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이 나태지옥의 끈을 한 번은 끊어야겠다 싶었다.
4. 남쪽으로, 남쪽으로
봄이 나에게 더디 오길래 내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도 남은 휴가를 탈탈 써서 부산에 다녀왔다.
영하 15도의 서울을 떠나 영상 8도의 부산역에 내리자 몸에 있던 냉기가 스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봄볕 아래 쌓인 눈처럼. 부산에서 지내는 3일간은 하루종일 아이들과 밖에 나와서 걷고 모래놀이 하고 먹고 돌아다녔다. 다른 지역에 가서는 숙소에서 밥을 해 먹거나 시켜 먹었다면 부산에서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돌아다니기 좋았고 많이 움직여서 배가 고픈 아이들은 식당에서도 잘 먹었다. 그새 아이들이 자라서 외식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가능한 숙소로 배달시키거나 포장해서 먹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부산 사람들의 친절함도 한몫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반달눈이 되며 귀여워해주는 사람들의 배려를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겨울엔 부산에서 지낼 거야.
남편은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이유는 부산이 아예 남의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끼는 친구가 있는 곳이라 더 그랬다. 한걸음에 마중 나온 친구는 나의 얇은 패딩에 깜짝 놀랐다. 나는 포근한 부산이 너무 좋다고 하자, 친구는 요즘 부산이 젤 추워진 거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친구는 롱패딩 차림이었다. 그 집에서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우리가 각자 결혼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벌써 두 남매, 세 남매의 엄마가 되어 만나다니... 감격스러웠다. 좋은 친구는 오랜만에 봐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밀린 수다를 떨며 많이 웃고 많이 먹고 친구는 우리를 숙소까지 태워주었다.
나는 한때 이 친구의 이름을 내 아이의 이름으로 지을까도 생각했었다. 푸근하고 맑은 사람.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사람. 내가 부산에 더 자주 오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이 친구 덕분이리라.
추운 몸과 마음을 달래고 서울로 돌아와 보니 원기가 많이 회복된 기분이었다. 날씨가 사소한 변수가 아니라는 점을 온몸으로 깨닫고 온 거였다. 부산에서 보낸 며칠은 봄을 기다리는 내게 위안이 되었다. 철새들이 겨울이 되면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 것은 본능에 의한 행동이다. 나도 어쩌면 나의 본능에 의해서 부산에 온 것 일 수도 있겠다.
5. 봄을 기다린다.
봄이 되면 나는 생명력이 움튼다. 이건 내가 봄에 태어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따뜻해진 공기와 더불어 나무들이 새순이 나오면 나도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그런데 봄을 만나려면 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만약에 사계절 중에서 봄여름가을만 있다면 벌레들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진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돈만 많으면 봄여름가을봄여름가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었기에 이 글을 읽고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열대 지방을 여행하면 벌레들이 많았다. 그래, 모든 계절이 의미가 있다. 겨울이라는 시간을 겪으면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의 삶에서도 겨울과 같은 시기가 있다. 나에게 유독 겨울처럼 추웠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입시와 자격시험과 유산의 기억이 떠오른다. 모두 다 겨울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가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사는 데에는 능숙해질 수 없으니까, 매사에 초보이기 때문에 겨울과 같은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시련에 초연해질 수는 없더라도 미리 앞서서 걱정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저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계절은 돌고 도니까.
힘든 계절이 끝나면 반드시 좋은 계절이 온다.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만 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은 밑바닥에 가서는 다시 위로 튕겨오를 수 있는 발구르기를 할 수 있다. 나는 그 계절을 지나며 발을 구를 준비를 한다. 그리고 계절에 질 것 같을 때에는 잠시라도 환경을 바꿔주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란 것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