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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Apr 04. 2023

자기착취하고 앉아있네

돈은 나에게, 시간은 아이들에게

어떤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는 어휘를 새롭게 알고 나서야 명확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가스라이팅이 그렇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알고 나면 상황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거다. 


잘못을 한 사람이 오히려 피해를 받은 사람 탓을 하며 너의 잘못이라고 생각을 주입하는 순간에 '가스라이팅 하고 있네'라고 알아차리면 그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쉽다. 


새로운 개념을 명확한 어휘로 알고 나면 마치 뿌옇게만 보이던 시야가 맑아지듯 현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단어를 알고 익히는 것은 세계가 확장되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은 어휘와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만난 '자기 착취'라는 단어는 처음 읽자마자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마치 '엉뜨'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무슨 기능인지 알게 되는 것처럼. 


6.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써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9. 성과주체는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계급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계급에 맞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노력하면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회이다.(진짜?)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만약 아무것도 안된 존재라면, 그것은 오직 내가 열심히 노-오력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성과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나도 나를 착취한다. 나도 나를 가스라이팅한다. 최근에 깨달은 셀프가스라이팅과 자기착취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휴직이 6년에 접어들자 돈을 벌던 나의 모습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에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면서 그럼에도 알차게 가정경제를 꾸려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필요이상의 강박이 있었는데 그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한테 이게 꼭 필요해? 

아이들은 몸이 커가기 때문에 철이 지날 때마다 그에 맞는 옷과 신발을 사야 하지만 나는 몸이 크지 않으므로 굳이 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이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비용은 아끼지 않으면서 내가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망설이게 된다. 소비 중에서도 내 옷이나 신발을 사는 것은 늘 후순위로 미루게 된다. 아이들이 그냥 놀다가 오는 것과 같은 어쭙잖은 활동에는 몇 만 원을 내면서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한 부대비용에는 망설여진다.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굳이??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옷을 사려다가도, 피아노를 배우려다가도 


내가 일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옷이 뭐가 필요해?

내가 지금 피아노를 배워서 뭐 하게?


라는 마음의 소리에는 대답이 궁색해진다. 그러다 보니 무채색의 옷을 아무런 고민 없이 번갈아 입고 내가 아니라 아이가 다닐 피아노 학원만 검색한다. 


최근에 여행을 가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들을 보니 내 옷이 다 비슷비슷했다. 나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 돈을 쓰는 게 아까웠다. 아끼고 싶었다. 그리고 아끼기 가장 좋은 게 내가 쓰는 돈이었다. 환경보호의 차원에서도 옳은 일이긴 했다. 세상에 옷은 넘쳐나고 바다엔 쓰레기가 가득 차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 소비에 죄책감을 느꼈다. 어찌 보면 기특한 생각이자 바람직한 행동일 수 있는데, 깨닫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옷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도 있지만, 스스로 몸가짐을 달리하게 해주기도 한다.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마음도 다잡아진다. 운동화만 신다가 굽이 있는 신발을 신으면 허리를 자동으로 펴게 된다. 곧게 뻗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옷을 다르게 입을 때 느끼는 몸의 변화와 그것을 통한 깨닫는 새로운 자극의 가치에 대해 내가 너무 평가절하한 것이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는 몸의 자세도 마음도 후줄근해진다.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장소에 가고,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 


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비타민D처럼 부족했고 햇빛을 쬐려는 간단한 시도마저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굳이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걸 하느라 나에게 돈을 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24시간 영유아인 아이 셋을 몸과 마음이 건강하도록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기본적인 것부터 책을 읽어주고 필요한 공부도 가르쳐주면서 철철이 몸에 맞게 옷과 신발을 사서 바꿔주고, 나이에 맞게 필요한 책과 학습도 제공해 주면서 그 와중에 살림도 하며 가정경제도 알뜰히 꾸려가는 것.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계절이 바뀐다고 옷 한 벌 안 사준다. 자기 착취다. 만약에 공고를 내서 이 모든 일을 할 사람을 뽑는다면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채용공고다. 척박한 근무환경이기에 착취이고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착취다. 


아이들과 있다 보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예쁘거나 소재가 민감한 옷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늘 비슷비슷한 색감의 편한 소재의 옷만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내 셔츠에 우유를 뱉을 나이는 아니다. 아기띠를 하거나 안아서 재워야 할 나이도 지났다. 이제는 아이들 위주가 아닌 나의 몸과 마음을 환기시켜 주고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옷을 입어도 된다. 아무도 내게 츄리닝만 입으라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후순위로 두는 습관을 고쳐먹을 때가 왔다. 아이들 옷을 사줄 때마다 내 옷도 하나씩은 사자. 


뿐만 아니다. 첫째가 6살이 되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5살에 떠듬떠듬 한글을 읽기 시작한 아이는 얼마 안 있어 책을 혼자 읽기 시작했다. 읽기 독립을 하자 아이는 빠르게 책에 빠져들었다. 스펀지처럼 지식을 습득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아이에게 좋다고 하는 무언가를 더 많이 제공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틈만 나면 6살이 할만한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좋다고 하는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영어, 사고력 수학, 발레, 피아노, 태권도, 축구 등등 모두가 '6살이면 적기'라고 광고했다. 자원이 무한했다면 이 모든 것을 하게 했을까? 나는 막상 뭔가를 시작하지는 못하면서 정보수집이라는 미명하에 한없이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고 다녔다. 끊임없이 뭔가 다른 건 또 없나 찾느라 시간을 보낸 거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쓴 글에 인생선배의 댓글을 보았다. 


돈은 나에게, 시간은 아이들에게 


이 문장을 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나는 반대로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 쓰질 못했으며, 간절히 혼자 있는 시간을 바라면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좋을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찾느라 말이다. 그러고는 지쳐서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벌러덩 누워버리곤 했다. 육아가 힘들다고. 


나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  


27.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28.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피로사회>에서는 자기착취의 원인을 성과사회로 보았고, 성과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을 특징으로 한다. 아이에게 좋다고 하는 거라면 부모는 계속 찾아보고 제공해줘야 한다는 생각 또한 '긍정성의 과잉'이다. 


긍정성의 과잉. 그러니까 발전이라면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면 해야 하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말하면 발전하지 않는 삶은 정체된 삶이고 정체된 삶은 좋지 않다. 이런 생각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원인이 된다. 만족을 모르고 스스로를 계속 몰아세운다. 


긍정성의 과잉은 번아웃을 불러오고 번아웃은 우울증에 다다른다. 여기까지 읽으니 현대사회에서 우울증이란 당연한 귀결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문득문득 느끼는 허탈감과 우울감은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세우는 자기착취의 과정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기착취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은 나에게, 시간은 아이에게 


'돈을 나에게' 준다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대해 눈에 보이는 보상을 하라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적절하게 준다는 것은 자기착취를 하고 있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란 뜻이다. 이쯤이면 충분하다며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앉혀서 숨을 돌릴 틈을 줘야 한다. 50분 수업을 하면 10분을 쉬는 게 학습에서도 효율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학교시간표가 그렇게 되어있다. 우리에겐 숨을 돌리며 잠시 뒤를 돌아보며 잘 걸어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북돋우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생은 단거리 시합이 아니니까. 


'시간을 아이에게' 준다는 것은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하는 다양한 것들이 사실은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깨닫고 진짜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와의 시간이란 것을 가르쳐준다. 유년기는 평생의 삶을 열심히 살기 위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시기라고 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개운해서 활기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듯, 안정적으로 유년기를 보내면 이후의 인생을 활기차게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쯤 되니 피아노는 나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기 착취'와 '긍정성 과잉'을 알아차리기.

돈은 나에게, 시간은 아이에게 쓰기.


새로운 개념을 깨닫게 해주는 어휘를 많이 가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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