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이 축복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예민함

by 단아


밴쿠버, 피겨, 동계올림픽. 제게 2010년은 김연아 선수로 기억됩니다. 푸른 의상에 얼음 선반을 오고 가는 고운 몸짓. 사람의 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의 기술이나 채점 방식에 전혀 알지 못했지요. 그럼에도 김연아 선수가 보여주는 극한의 미감에 홀려 화면이 뚫릴 듯 보았습니다. 궁극의 미(美)에는 약간의 두려움도 서려있기 때문일까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찌르르했어요. 이토록 아름다움 것이 세상에는 더 있겠지,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이만큼 기쁠 수 있다는 걸까. 기대가 차올랐습니다. 아! 또 있어요. 작년 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고 뒤통수가 짜릿할 정도로 기뻤거든요. 그간 책을 읽으며 속절없이 침잠하고 감탄한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언어로, 글을 통해 농도 짙은 감각을 체험하였고요.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서사를 사력을 다해, 아프고 아름답게 써 내려간 글의 가치를 세계적 권위를 가진 평단에서도 알아보는구나. 알아볼 수밖에 없겠지 하며 혼자 찌르르하고 아주 난리였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는 것도, 유난스레 기뻐하는 것도 제가 가진 예민함 덕분이겠지요. 요것 봐라? 나름 쓸만한 구석이 있잖아. 좀 봐줘야겠어요. 평소 예민함은 살살 달래고, 봐주고, 어떨 땐 으름장을 놓아야 하는 까다로운 존재잖아요. 물리적 실체가 없는 관념에 불과하지만 얼마나 영향력이 크고 기세등등한지. 그렇기 때문에 예민함을 축복이라 부르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결점이라 여겼던 특성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라는 표현이 갖는 함의가 있겠지요. 힘주어 말하는 맥락도 이해하고요. 다만 예민함과 이로 인한 파장으로 고군분투하는 누군가의 얼굴과 견딤의 날들을 생각하면.. 차마 선물이라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긍정이나 찬사를 빼놓고 예민함을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요. 사실 불편한 것도 맞고(너무너무). 공들여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다루는 방법을 알 때 까진 무던한 사람들 보다 시행착오가 많은 것도 저명하거든요. 갈고닦지 않은 예민함은 그야말로... 날것의... 짐승.. 제련했을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이런 측면과 저런 측면을 통합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지 어느 한쪽 면만, 되도록 좋은 것만 보고 취한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불편해. 불편한데, 가지고 태어난 것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어. 어떻게 보면 세련된 면도 있지. 덕분에(?) 아름다움을 애정하고 풍덩 빠질 수 있으니까. 센스로 발휘되기도 하지. 그러니 아휴 뭐 어쩌겠어하며 예민함을 살짝 껴안고(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함께 잘 살아가자 도닥거리면 되는 일이에요. 그때부터 찾아드는 변화는 분명히 존재해요. 우리가 우리를 우리로써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마음의 여유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니까요.


균질하고 동일한 개체로만 이루어진 생태계는 건강하다 부를 수 없어요. 드넓은 초원에 얼룩말만 있다? 혹은 사자만 있다? 무너진 균형과 지나친 치우침은 자연스레 소멸의 길로 이어집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참 중요한 거예요.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니까요. 예민하고 예민한 우리들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겨도 좋지 않을까요. 예민한 존재도 있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을 다시 한번 보고, 약하거나 독특한 누군가에 대해 세상이 알게 하는데도 기여한다고 믿어요.


그러니 예민함이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어도 썩 봐줄 만하지 않나요.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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