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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들과 오빠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나와 가장 가까운 여자들이 다 모였네.”

 2년 전 5월의 어느 날, 오빠가 장어구이집에서 엄마, 나, 새언니, 조카(오빠의 딸)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한 말이다. 정말이지 오빠 입장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여성이 다 모인 자리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 두 여자에게 가장 가까운 남자는 나의 오빠, 엄마의 아들이다. 엄마에게는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소중한 아들이고, 나에게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고마운 오빠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는 오빠와 관계된 말과 생각과 행동이 참 자주 오고 간다.  

 3살 터울인 오빠는 나와 참 많이 다르다. 생긴 것은 비슷한데 (그러니 오빠 딸이 나를 닮지 않았을까) 성격은 매우 다르다.

 내가 기억하는 오빠와 나의 차이는 집에 머무는 시간의 양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오빠를 집에서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학교 가기 전 아침 식사 시간이나 하교 후 학원 가기 전 잠시 동안이야 오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합치면 1시간 쯤이나 될까. 24시간 중에 자는 시간 빼고는 오빠는 늘 밖에 있었다. 학교, 운동장, 독서실, 학원 등 갈 곳도 많았고 친구들도 많았던 오빠는 항상 밖에서 기쁨을 찾고 스트레스를 풀었던 아이였다.

 반대로 나는 늘 집에 있었다. 집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텔레비전을 봤다. 그게 좋았다. 친구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만 만났다. 다 자라서 돌아보니 그게 서로의 성격대로 살아온 모습인데, 나는 내향적이고 오빠는 외향적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덕분에 집에서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부모님이 일 때문에 늦으실 때면 나는 늘 혼자였다. 그때 오빠가 집에 들어와 주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그 점은 어린 내게 조금 아쉬웠다.  

 대학 시절에 나눈 짧은 대화로도 나는 오빠가 나와 참 많이 다르다고 느낀다. 나와 오빠는 둘 다 신촌의 대학에 다녔는데 같은 학교는 아니었다. 나는 수업시간 한참 전에 출발해 시간에 구애 없이 천천히 등하교하기를 좋아했다. (뭐든지 쫓겨서 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데 오빠는 늘 시간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 지하철이나 버스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도 없었는데 철두철미하게 시간 맞춰 움직였다.  

 “을지로 3가역에서는 2-2에서 타야 2호선 환승이 빨라. 후문에서 버스 타면 안국역으로 오는 거 알지?”

 오빠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모를 정보였다.

 3살 차이가 날 뿐이지만, 그래서 같은 세대이지만, 오빠는 언젠가부터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하긴 20살 무렵에 집안에 가장이 되어야 했으니 오빠는 내가 알기보다 꽤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오빠에게 고마운 기억이 너무나 많다. 내가 23살 때 처음 시험 봤던 신문사에서 최종 탈락했을 때 오빠가 내게 보내주었던 “기죽지 마”라는 문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5년 전 사회부 기자 시절 출장을 가던 중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맨 처음 연락한 사람도 오빠였다. 오빠가 위로해주고 대처방법을 일러주지 않았다면, 나는 혼란을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오빠에게 신세 진 기억이 너무나 많다. 가정을 이룬 오빠에게는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만 그래도 가족 일이나 회사 일로 아주 힘들 때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오빠이다. 그래서 오빠에게 난 늘 빚을 진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런 오빠에게 생활의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오빠는 한 달 전부터 주재원 발령을 받고 중국에서 살고 있다. 비자 때문에 일주일 정도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오빠는 임신 6개월인 새언니와 32개월 딸을 두고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군대를 다시 가는 것 같아. 둘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쓰여서...”

그런 오빠의 불안함이 엄마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엄마와 나는 새언니와 조카를 더 잘 보살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잘 지내고 있을게. 시킬 일 있으면 나 부담 없이 시켜.”

 오빠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저녁, 오빠 생일선물로 간에 좋다는 밀크시슬을 전해주러 오빠 집에 다녀왔다. '현실 남매'답게 담담하게 카드를 썼다.

 “그곳이 어디든 어두움이 떨구지 않기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버스데이걸>의 한 문장이다. 24일(오늘)은 오빠의 생일이다. 오빠가 어디에 있든 밝음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빠가 있는 중국의 팬더. 중국 서북쪽 우루무치공항에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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