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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은영 Dec 10. 2023

잡념 수집가

가끔씩 딸과 샤워를 같이 한다. 샤워에 있어서는 독립시킨 지 오래지만, 가끔, 이 아이는, – 지금도 어린 아이이지만 – 더 어린아이가 되어 엄마에게 접선을 청하곤 한다. 이렇게 함께 샤워하게 될 때 아이가 머리를 꼼꼼히 감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두피는 손톱이 아닌 손끝 ‘면’으로 야무지게 쓱싹거려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시연해 보이기도 한다. 비누칠 할 때는 평소 꼼꼼히 씻지 못했을 등을 박박 문질러주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샤워하며 무심코 폼클렌져 뚜껑을 여니 딸이 남긴 무질서함이 보인다. 어제 샤워할 때 아이가 튜브를 무념무상으로 쭉 눌러 과하게 내용물이 분출되었고, 필요한 양만 조금 취한 후 그 위로 뚜껑을 닫아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일상 곳곳에서 보이는 딸의 흔적에서 딸의 태도를 추론하게 된다. 단편적으로 한 경우만 보고 결론짓지는 않지만 어떻든 평소 수집한 여러 현상이 그려주는 맥락에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아이의 흔적을 만났을 때, ‘어린아이의 미숙함, 그리고 귀여움’에서 생각이 머물게 되는 때는 지나버렸다. 그러기엔 아이가 이제 충분히 컸고 그만큼 자기 관리, 자기 통제, 또는 사회화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사소한 잡념에서 시작하였어도 이제는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이른다. 앞에서 예로 든 상황에서는, ‘조심성 있게 쓸 양만큼 나오도록 짜라’는 훈육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아이에게 보내는 가르침, 또는 교정의 메시지가 아이 입장에서는 참 많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같은 경우가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까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이렇게 잡념은 흐르고, 각종 상념, 개념이 이어붙여 져 생각이 흐르고 흐른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아이 식사를 챙겨 먹이고, 아이를 채비시켜 학교를 보낸 후, 고양이 털로 뒤덮인 집 바닥을 청소기로 민다. 바닥의 먼지와 고양이 털, 그리고 각종 인간의 털들을 꼼꼼히 진공청소기로 흡입하면서, 선반 위의 먼지, 한참 묵혀 있는 저 위 먼지들까지 감지하지만 늘 무시한다. 한도 끝도 없는 청소의 굴레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몹시 자유로운 일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그래서 그 시간에 남편에 비해 훨씬 아이 캐어에 시간을 투입하지만, 집안 곳곳의 묵은 먼지와 때를 캐어하는 것도 내가 맡아 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매 순간 가사일 한 종류를 더 하느냐, 같은 시간에 나의 작업을 더 하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끊이지 않는 선택의 순간들, 이 빈번함 때문에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따져서 선택하는 것에서 어느새 ‘무엇이 더 귀찮은가’를 따져 귀찮지 않은 것, 덜 귀찮은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따져 묻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직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고, 고민의 빈도수가 올라갈수록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귀찮으면 도저히 잘할 수 없게 된 타성에 젖게 된 듯하다.  


요 며칠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난 아플 때 제대로 환자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이번엔 비교적 확실히 아파서 앓아눕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명확한 상황에 대해 마음이 편했다. 어중간하게 아프면 뭐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아 나를 편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환자가 되어 가족들이 나를 수발들게 하고 내가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알게 하여야 하는데, 늘 혼자 끙끙 앓고, 마지못해 “몇 개만 수발들어 줄 수 있어?”라는 말로 무언가를 받아내는, 나는 나에게 무척 엄격한 사람이다. 아니, 자존감이 낮은 것일까? 가족들이 경우 없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일 텐데 나는 미리 서운해하고 옆구리 찔러 받아내기 싫어 묵묵히 나만의 고집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 나의 태도, 화법에 대한 연습을 더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픈 시기에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아플 때 제대로 환자가 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처럼 잡념에서 시작해서 어떤 생각에 미치고, 때로는 어떤 결심도 하게 된다. 아무런 결과가 없어도 잡념의 과정에서 나는 우연히 힌트를 얻게 된다. 그리고 흐르는 잡념 자체가 나의 인생을 탐구하는 에너지의 흐름처럼 느껴져서 문득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확고하게 믿었던 것들이 허물어지는 경험들을 하면서, 다음 실천을 위한 고민과 결심을 지속해서 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며 얻게 되는 깨달음이 작은 빛이 되어 그 순간만큼은 밝혀주는 기분이다. 내가 생각해내는 것, 그것이 언어화되어 조금이라도 정리되는 것만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 걸어올 때마다 노닐듯, 때로는 진지한 대담을 하듯 응하며 살게 될 듯하다. 잡념의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 삶의 하나의 중요한 에너지 흐름인 듯한 느낌적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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