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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l 20. 2020

부유하던 의미가 존재에 닿을 때

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민음사




   데카르트가 내세운 "심신이원론"의 관점에서 '영혼 vs 육체' 또는 '정신 vs 물질'이라는, 그의 개념을 그대로 차용하자면 '사유 vs 연장'이라는 두 대립항에 관련된 논의를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 <공각기동대(브런치 글: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인조영혼 참조)>를 통해서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이 두 대립항을 각각 '정신'과 '육체'라고 크게 뭉뚱그렸을 때, 이 대립은 여전히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철학이나 문화적 담론의 영역에서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영화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고전적이면서도 참신한 변주를 동반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거리로 차용되기도 한다. 그런 변주의 한 예로써, 육체는 기계로 되어 있지만 의식의 기반인 뇌만은 순수한 인간의 뇌를 가진 지상의 존재와, 육체는 온전한 인간의 몸이지만 뇌는 기계로 만들어진 전자두뇌를 가진 천상의 존재를 대비시킨 후쿠토미 히로시의 <총몽(브런치 글: 유토피아를 향한 절망적인 몸부림)>과 그 원작의 역설을 들 수 있다. 아니면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육체적, 물질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채 온전히 정신과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인 보르헤스의 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브런치 글: 관념으로 건설된 상상의 세계 참조)>의 예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장, 물질, 육체라는 한 축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의 세계를 리얼하게 보여줬던 보르헤스처럼 두 대립항을 완전히 분리시켜 육체 없이 오로지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경우와 의식 없이 오로지 육체로만 존재하는 경우의 대비를 말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런 상상을 소설이라는 장치로 담아낸 바 있으며 그 소설이 바로, 오늘 소개할 <존재하지 않는 기사>다. <틀뢴>에서 물질을 제거함으로써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완전한 세계를 보여준 보르헤스는 자신의 다른 단편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혼돈 vs 질서'라는 대립항에서 질서가 제거된 완벽한 우연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보르헤스가 두 대립항에서 한쪽을 제거했을 때의 극단적 상황을 현시했다면 칼비노는 두 대립항에서 한쪽의 제거가 아니라 그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을 때의 극단적 효과에 관심을 갖는다. 칼비노의 트릴로지(Trilogy) 소설인 "우리의 선조들" 시리즈는 대립 관계의 단절이라는 이런 극단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오늘 소개할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이 트릴로지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앞서 언급한 대로 육체 없는 의식과 의식 없는 육체를 대립시켜 그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트릴로지의 첫 번째 작품인 <반쪼가리 자작>의 경우 몸이 반으로 나뉘어 반쪽은 절대선을, 나머지 반쪽은 절대악을 담지한 주인공을 내세워 선과 악이라는 고전적 대립관계를 파헤치고 있으며 두 번째 작품인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결코 땅에 내려오지 않고 나무 위에서만 사는 주인공을 통해 규범과 탈규범의 문제를 화두로 던진다.


   이처럼 칼비노는 대립항의 한 항을 제거하는 극단을 예시한 보르헤스와는 다르게 두 대립항을 모두 양 방향의 극단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두 항의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철학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난해함과는 다르게 칼비노의 소설은 그렇게 어렵지도, 무겁지도 않으며 경쾌하고 재미있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기사> 역시 마찬가지로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의 행간은 그저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만은 없는, 그래서 심도 있는 고민을 요하는 화두를 내포하고 있다. 이 화두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우선 정신과 육체의 관계가 되겠지만 사실 이 소설은 이 두 항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발은 정신과 육체지만 소설의 전개를 통해서 도드라지는 점은 "존재의 드러남"이며 더 나아가서는 '존재 vs 의미'라는 새로운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우선 '기사 소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렇기에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망토를 펄럭이는 기사들이 등장하여 모험과 사랑을 펼치는, 그리고 판타지가 가미된 전형적인 기사 소설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칼비노의 이 판타지는 형식부터가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기에 단순한 기사 소설의 전형성을 따르지 않는다. 소설은 8~9세기, 카를로스 대제가 통치하던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유럽은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의 공통 기원인 프랑크 제국이 세 개로 쪼개지면서 콘스탄티노폴 천도 후의 로마 제국의 정통을 서로 자처하던 시대였다. 또한 이미 쇠락해버린 로마 제국의 멸망에 치명타를 가했던 훈족을 위시한 동방의 여러 이교도들에다 7세기 무렵 무함마드라는 예언자에 의해 탄생한 이슬람이 제국을 형성하며 공존했던 시대였기에 언제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사 소설이 등장할 수 있던 역사적 배경 역시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용병의 수요가 끊길 수 없는 시대였기에 가능했으리라소설의 형식 역시 독특하다. 이 소설은 소설로서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소설의 스토리 전개와 소설 자체의 글쓰기가 병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는 이 소설의 저자가 등장해야 하는데, '테오도라'라는 수녀가 그 주인공이다. 수녀원에서는 속죄의 한 수단으로 테오도라에게 글쓰기를 부과했고 이에 그녀는 소설의 창작 과정을 함께 담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즉,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와 더불어 이 전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그 방식에 대한 설명이, 그리고 창작 과정에서 수반되는 다양한 고통에 대한 토로가 함께 등장한다. 


   저자 테오도라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인물은 '아질울포'라는 용병 기사다. 하지만 이 기사는 매우 독특하다. 셀림피아 치테리오와 페츠의 기사, 코르벤트라츠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니 가문과 기타 가문 출신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을 정도로 다른 어떤 기사도 범접하지 못할 공적을 쌓게 해 준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그의 투구와 갑옷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고 뽀얀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빛나는 투구와 갑옷 속은 텅텅 비어있는, 그래서 그것들을 벗겨 버린다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다. 쉽게 말해서 그는 육체를 지니지 않고 오로지 의지와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존재다. 이 소설은 이미 판타지지만 아질울포의 존재 근거 역시 판타지이기에 가능하다. 이 소설을 쓰고 있는 테오도라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을 "세상 만물들이 아직은 혼돈 상태에 있었기에 실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름과 생각과 형식과 제도들이 심심찮게 존재하는 동시에 이름도 특징도 없는 사물과 능력과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존재하고자 하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어떤 의지,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충돌하려는 의지도 있었지만, 그것의 집요함은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기에 아무런 행동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희박했던 의지와 자의식은 감지할 수 없는 수증기들이 구름으로 응축되듯 응고되어 덩어리를 이루고 우연에 의해서든 본능에 의해서든 이름이나 한 가계(家系), 또는 군대 계급, 수행해야 할 의무와 정해진 규율로 변할 수도 있었고 특히 텅 빈 갑옷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아질울포는 이러한 집요한 의지의 응축물이 육화되지 않은 의식으로 현현(顯現)된 경우이며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쇼펜하우어적 의지가 표상의 세계에 표상 없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반대로 실재하는 사람도 갑옷이 없다면 사라질 위험에 맞닥뜨리는 시대이기도 했기에 이 의식의 덩어리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갑옷을 걸치고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육체가 없었기에 그는, 육체를 지닌 존재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지치지도 않았고 잠도 필요 없었으며 감정적 흔들림도 없었다. 대신에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엄밀함과 정밀함, 정확성을 체화하여 기사라는 개념이 요구하는 도덕성과 행동을 몸소 실현한 인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의 프로토타입(Prototype) 자체가 되었다. 반면에 그런 개념적 완벽성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평범한 기사들에게 그는 언제나 규율에의 복종과 엄밀성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매우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여느 현실적 기사라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제약이나 한계란 것은 전혀 갖출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한데, 이때의 제약 또는 한계란 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것이며 여기에는 엄격한 규율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대함과 융통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유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정(情)'이라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다, 아질울포의 경우는 육체라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이며 유한적인 제약이 없기 때문에 마치 코드로만 구성된 프로그램처럼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동시에 그런 상태를 시간의 제약 없이 유지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결코 지치지 않으며 그렇기에 휴식도 필요 없는 완전한 정신적인 존재다. 이런 정신적 존재라면 진정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없애 버릴 수 있기에 기사도 정신 자체를 현실로 실현시킨다. 그렇기에 전장에서도, 일상에서도 모범의 전형으로 상승되며 이 전형은 반대로 자신의 모범을 결코 그렇지 못할 인간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강요하기까지 한다. 아질울포는 인간사에 있어서 중요한 감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인간미'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이는 되려 약점이 되어 기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이런 따돌림, 즉 흔히 말하는 '왕따'는 그에게 있어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왕따가 아니라 다른 모든 기사들을 그가 따돌려 버리는 '전따'가 더 어울릴 것이다. 이런 완벽한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름 또는 작위에 대한 집착이다.  칼비노는 소설 속에서의 존재의 의미를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우선 전제하는데 그것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된다. 그렇기에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것이다. 의지와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는 그래서 물질성이 전혀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처럼, 명명 행위는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질울포에게는 이름이나 작위가 그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에 수많은 무공을 세워 왕에게서 여러 작위를 하사 받았을 것이다. 


   반면에 이름도 특징도 없는 사물과 능력과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했기에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이 그저 사물처럼 육체라는 덩어리로만 존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질울포가 존재의 유지를 위해 활약하던 시대에 정반대의 존재,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구르둘루'가 있다. 구르둘루는 의식이 없기에 모든 행동이 즉자적이며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그래서 모든 욕망에 있는 그대로 충실한 그저 육체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눈 앞의 존재'이고,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즉자적 존재'다. 현상학적 지향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현상과 본질이 그대로 일치하는 사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구르둘루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즉자적 존재이기에 그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세계 속에서 자연이나 환경의 일부로 보인다. 숨은 그림처럼 사물들 속에 혼재된 그는 의식 없는 다양한 행위를 통해 의도치 않게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 드러나는 그 양태에 따라서 사람들은 그에게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그는 보아몰루츠인 동시에 아몰루츠로 불리기도 하며 카로툰이면서도 발린가치오로도 불리고 베르텔라가 되었다가 구디-우수프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닌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이름을 다 가질 수 있는 존재인 구르둘루는 역설적으로 이름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는 반면에 존재하는 사람인 구르둘루는 이렇게 수많은 이름을 부여 받음으로써 되려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있으되 없는 존재, 사방의 모든 물질적 세계의 일부로서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구르둘루는 우연찮게 카를로스 대제의 눈에 띄어 그의 명령에 따라 아질울포의 하인으로 귀속된다. 구르둘루를 아질울포에게 귀속시키며 남긴 대제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아, 재미있는 일이야! 여기 있는 이 백성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저기 있는 나의 용장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군...


   이렇게 의식과 육체의 항만 존재한다면 이야기의 전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존재한다라고 할 때 우리가 익히 떠올리게 되는 상식적인 인물을 몇 명 추가한다. 우선 '랭보'라는 젊은이다. 이교도 장군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혈기 넘치는 이 젊은이는 오로지 복수를 목적으로 기사가 되고자 무예를 연마했고 이교도와의 전투에 자진해서 참전한다. 다른 기사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모범 자체였던 아질울포는 병영 생활을 통해서 아직은 서툴고 의욕만 앞서는 이 젊은이에게 자연스레 롤 모델이 되었다. 욕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복수의 기회가 될 첫 번째 전투에 마침내 임하게 되었을 때 랭보에게는 한 편으로는 드디어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설렘과 다른 한 편으로는 처음 경험하게 되는 이교도와의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 랭보는 자신이 생각했던 전투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의 전투에 실망한다. 게다가 운 좋게도 아버지의 원수를 만났지만 그 원수는 랭보와 대결을 벌이기 직전에 황당한 이유로 다른 기독교인의 창에 찔려 죽고 만다. 교과서적으로 그렸던 전투의 현실과 존재의 이유였던 원수의 죽음은 이내 그를 허무로 이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행하지 못한 그의 죽음 앞에서 그는 그것을 복수의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래도 그의 죽음에 기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순된 감정이 교차되었다. 그런 허무와 모순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원수의 죽음은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바쳐졌던 자신의 삶에 홀가분함과 여유를 주었으며 이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숨통을 틔어 주기도 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의 교차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있을 때 이교도들이 그를 공격했고 랭보는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 순간 황옥색 튜닉과 갑옷을 입은 채 보라색 망토를 펄럭이며 나타난 새로운 기사가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여 그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그 기사는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전에 떠나 버렸고 랭보는 고마운 감정과 더불어 감사의 예를 거부한 것에 대한 모욕감으로 그 기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골짜기 계곡에서 그 기사를 찾았을 때 그는 투구와 상의 갑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쪽 갑옷은 모두 벗어버린 상태다. 랭보는 놀랍게도, 그 기사가 여자임을 엉덩이와 배 아래쪽을 보고서, 그리고 그녀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하체가 발산하는 육감적인 자태에 랭보는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 직감했지만,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있는 그를 발견한 그녀는 "슈바이트 훈네(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과 함께 그에게 단검을 던지고는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 기사 소설에 사랑이라는 주제가, 소위 러브라인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테오도라는 랭보가 사랑하게 될 '브라디만테'라는 여인을 내세운다. 이제 랭보에게는 새로운 존재의 이유가 생겼다. 복수라는 삶의 목표가 사라진 터라 어쩌면 그의 존재 자체가 흩어질 수도 있는 마당에 그가 존재해야 될 사랑이라는 새로운 대체물이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디만테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로써 랭보라는 존재에 닿은 우발적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테오도라가 내세운 사랑의 대상은 악당들에게 납치되거나 마법에 걸려 백마 탄 기사들의 구조를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아리따운 여인이 아니라 스스로 갑옷을 걸치고 전투에 참가하여 이교도들을 물리치는 용맹스러운 여전사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존재의 이유가, 확실하게 자신이 부여잡은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여전사가 된 이유는 교과서에 나온 기사도 정신 그대로의 강건한 규율과 엄밀함, 정확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이론적으로만 온전히 가능할 숨 막히는 질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지향'이 아니라 '지양'이라 불러야 될, 자신이 추구하는 그런 질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녀의 실제 삶이 있었다. 공주로 자란 그녀는 손에 물을 묻힐 일이 없었기에 그녀의 막사는 만약 시녀들이 없었다면 전쟁 중에 빨래나 청소를 직접 해야 하는 남자들의 막사보다 훨씬 더 무질서한 최악의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실제 삶이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녀는 자신과 반대되는 삶을 동경하여 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녀는 다른 존재 방식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몸소 전사가 되어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용맹을 떨쳤지만 그녀 역시 글로 배운 기사도 정신에는 한참 못 미치는 전장과 기사들이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이런 현실 앞의 그녀에게 의미로 다가 온 인물이 있었으니... 삶이든 전투든 모든 것에 대충 임하면서 그녀에게 치근덕대며 은근히 그녀의 막사로 자신들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그런 현실 기사들 속에서 기사도의 맹세에 온전히 부합하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였다. 그렇다, 브라디만테는 기사라는 정의에 넘치도록 일치하는 존재, 군대 전체를 통틀어 어떤 '의미'를 지닌 유일한 존재,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질울포를 사랑했다. 그러나 감정이 없는 아질울포는 사랑이라는 것에는, 물론 브라디만테에게도 하등 관심이 없었기에 그것은 온전한 짝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런 외사랑을 알게 된 랭보는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롤모델인 아질울포를 여전히 동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연적으로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동시에 브라디만테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진정한 사랑인지 의심할 필요도 있다. 랭보의 사랑은 혹시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즉, 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실현되어버린 복수라는 존재의 이유를 대체할, 그래서 그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새로운 대체물로서의 브라디만테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질울포와 브라디만테를 향한 감정의 혼란스러운 교차로 어찌하지 못하던 랭보가 맞닥뜨리게 되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랭보와는 반대되는 성격의 소유자인, 콘월 공작 가문의 차남 '토리스먼드'라는 젊은이다. "모든 게 혐오스러울 뿐이다!" 랭보가 혼란에 빠져 홀로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그가 랭보에게 던진 첫 일성이었다. 이처럼 토리스먼드라는 젊은이는 덕성과 용기를 바탕으로 하는 기사도 정신과 현재 진행 중인 이 전쟁의 성스러운 동기를 믿는, 그래서 아질울포를 우상처럼 우러러보는 랭보와 다르게 모든 것에 냉소적이며 회의적이고 염세적이며 비관적이다. 그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금 치르고 있는 이 전쟁 역시 승자도 패자도 없을 부질없는 행위일 뿐이라 주장한다. 랭보는 그의 이런 염세적인 논리에 반대하여 질서 정연하며 의미 있고 가치를 지닌 확실한 것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그 근거로써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도 존재하는 사람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 아질울포를 내세웠다. 하지만 토리스먼드는 코웃음을 치면서 아질울포라는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가짜이며 자신이 맘만 먹으면 그의 모든 공적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유일한 존재를 내세웠는데 그것은 "성배 기사단"이었다. 자신의 삶의 목표는 성배 기사단을 찾아 그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토리스먼드의 이런 논리 역시 자신의 존재의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으니, 이 불확실성은 자신의 출생의 비화를 구성하고 있는 암울한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밀이 바로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 아질울포를 무화시켜 버릴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테오도라는 이렇게 소설의 주요 인물들을 구성했다. 완벽하지만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 그의 하인이자 의식이 없는 즉물적 존재인 구르둘루, 동경과 사랑으로 아질울포를 향하는 브라만테, 그런 브라만테를 짝사랑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적 아질울포를 우상으로 삼은 랭보, 마지막으로 신비주의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하지만 아질울포를 혐오하는 토리스먼드, 이렇게 다섯 인물이 주가 되어 그녀의 소설은 전개된다. 이 시점까지(소설 속에서는 6장까지)의 그녀의 소설은 인물 소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밋밋한 이야기로만 이어져왔다. 이제 뭔가 소설에 흥미를 배가시킬 갈등의 요소를 등장시켜야 할 때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질울포와 토리스먼드의 갈등이다. 장소는 연회가 벌어지는 아군의 숙소다. 연회라면 술이 오가고 거하게 취한 용장들의 무용담이 당연히 식탁의 주제가 된다. 자신의 무용담을 몇 십배나 뻥튀기해서 늘어놓는 용장들... 하지만 이런 과장된 무용담을 푸네스적 기억을 통해 구체적 사실로 깨트려버리는, 시쳇말로 팩트 폭격으로 달아오른 술자리를 싸하게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역시 아질울포다. 자신이 겪고 보았던 모든 일들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질울포는 용장들이 떠벌리는 터무니없는 무용담들을 도장깨기 하듯 모두 깨트려버린다. 이런 인물이라면 당연히 인기가 좋을 리 없을 것이며 그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했던 카를로스 대제까지도 짜증을 낼 정도였다.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모험담을 부풀려서 기억하며 그렇게 부풀려진 영광은 진짜가 되고 자신들이 소유한 작위와 계급의 기초가 되어 준다는 어느 용장의 짜증 섞인 말에 아질울포는 단호하게 반박한다. 자신의 작위와 칭호는 결코 그런 식으로 부풀려진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기록들로 증명 가능한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작위나 이름이 그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고 믿는 아질울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발끈할 수밖에 없으리라.


   겉으로는 그렇겠지요... 아질울포의 말에 누군가 반박하고 나섰다, 바로 토리스먼드다. 또 한번 아질울포는 발끈했지만 이 어린 청년의 반박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아질울포의 존재의 근거는 바로 기사 작위라는 이름에 있다. 이 작위는 기사도 정신에 맞는 의로운 일을 했을 때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기사도 법전에 따르면 위험에 처한 귀족 가문 처녀의 순결성을 지켜 준 사람은 즉시 기사로 임명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처녀가 아닐 경우는 그저 명예 훈장과 급료 인상이 전부이며 작위 부여 따위는 없다. 십오 년 전 스코틀랜드 왕녀였던 처녀 소프로니아가 도적들에게 겁탈당할 뻔했을 때 아질울포가 도적떼를 물리쳐 그녀의 처녀성을 보존해 준 일이 있었다. 토리스먼드는 이 사건이 있었을 때 이미 그녀는 처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써 바로 자기 자신을 내세웠다. 즉, 자신은 콘월 공작 가문의 아들이 아니라 소프로니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증거로 토리스먼드는 자신이 품고 있던 스코틀랜드 왕가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십 년 전 당시 열세 살이었던 소프로니아가 자신을 임신했고 부모에게 혼날까 두려워 왕궁에서 도망쳐 고원을 떠돌다 황무지 벌판에서 그를 낳았다고 했다.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은 성배 기사단 소속의 기사라고 한다. 소프로니아는 잉글랜드의 들판과 숲 속을 떠돌면서 다섯 살 때까지 그를 키웠는데,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토리스먼드는 회상했다. 하지만 그때 아질울포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도적들에게 잡혔을 때 명예욕으로 혈안이 된 아질울포가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버렸고, 그녀가 왕족 출신임을 알고 가까운 콘월 성에 그녀를 맡겼다고 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명예를 위해 콘월 공작은 사생아인 자신을 양자로 입양했고 소프로니아를 멀리 떨어진 수녀원으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그 이후로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행복으로 충만한 채 자연스럽게 흐르던 자신의 삶은 바로 아질울포 때문에 끊기고 망가졌다고 한탄했다. 이제 사태는 심각해졌다. 카룰로스 대제가 내렸던 작위의 대상이 이미 후보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토리스먼드의 말이 맞다면 아질울포의 작위는 즉시 박탈되어야 하고 그동안 그가 쌓아온 무공이나 추가로 덧붙여진 모든 작위들 역시 무위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인즉슨, 작위와 호칭이 자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아질울포는 이제 비존재로, 무로 되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온전히 아질울포에게만 해당된다. 대제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용장들은 그 상황을 은근히 즐겼다. 그렇게 완벽하고 깐깐하며 앞뒤가 꽉꽉 막힌, 융통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사라면, 그가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은근한 기쁨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장 아질울포는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소프로니아를 찾아 당시 그녀가 처녀였음을 직접 증언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순결을 잃은 상태라며 순결을 빼앗은 상대를 찾아 그녀가 언제까지 순결을 유지했는지 밝혀내겠다고 한다. 그날 동이 트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났다. 우선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아질울포가 소프로니아를 찾아 떠났다. 돈끼호떼의 여정에 언제나 산초가 함께 하듯, 주인의 출정에 하인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르둘루도 함께 떠났다. 또한 전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를 지닌 사람, 자신의 인생과 전투에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자신의 존재의 의미인 아질울포가 떠났기에 당연히 브라만테도 급하게 그를 따라 떠났다. 아버지의 복수 이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그에게 사랑이라는 의미로 다가와 또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되어준 브라만테가 떠났기에 랭보도 그녀를 따라야만 했다. 토리스먼드도 그곳에 굳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소프로니아를 임신시켰을 것으로 예상되는 신비주의 집단인 성배 기사단을 찾아, 자신의 아버지들을 찾아 토리스먼드도 떠났다.


   이제부터 이들의 또 다른 모험이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테오도라는 이들의 여정을 스피디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입과 생략을 시도한다.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을 세웠다가 성벽이 있는 도시를 세우고 아니면 울창한 숲을 하나 그린다. 아질울포는 테오도라가 세운 장소를 지나며 소프로니아의 소식을 묻는다. 한참 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구르둘루가 자신의 주인의 소식을 물으며 갈지자로 그를 따른다. 뒤이어 브라만테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소식을 물으며 곧바로 뒤를 따른다. 그 후에는 랭보가 나타나 여전사의 소식을 물으며 또 뒤를 따른다. 이렇게 이들이 서로를 좇으며 기차놀이하듯 여정은 이어진다. 도시의 성벽에 다다랐을 때 수비대가 투구를 열어 얼굴을 보여달라며 아질울포를 막는다. 극성을 부리는 도적떼 때문에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성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한다. 이번엔 숲이다. 아질울포는 숲을 휘젓고 다니며 도적떼를 붙잡아 수비대 앞에 무릎 꿇린다. 감동한 수비대는 아질울포의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한다. "내 이름은 바로 이 여정의 끝에 있소." 이 말을 남기고 아질울포는 도시를 통과한다. 뒤이어 구르둘루가, 브라디만테가 그리고 랭보가 뒤따른다. 테오도라는 이 여정에 기사들을 유혹하여 색욕을 채우는 프리쉴라라는 이름의 귀부인이 사는 성도 끼워 넣었다. 프리쉴라와 하녀들만 기거하는 그곳으로 가게 된 아질울포와 구르둘루의 모험도 야하지만 코믹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특히 여기서 보내게 될 하룻밤을, 그럴 수밖에 없는 아질울포와 프리쉴라 사이의 플라토닉한 사랑과 본능에 충실한 구르둘루와 하녀들 사이의 에로틱한 사랑을 사실적으로 대비시켜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그렇게 아질울포가 수녀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곳 노인의 말로는 해안에 상륙한 무어족 해적들이 수녀원을 약탈하고 수녀들을 모두 노예로 끌고 모로코로 갔다고 한다. 소프로니아의 소식을 물었을 때 그녀는 팔미라 수녀로 불렸고 다행히도 가장 신앙심이 깊고 정숙한 수녀였다고 했다. 물론 납치된 수녀들 속에 그녀가 있었다고 한다. 아질울포와 구르둘루는 모로코로 향했다. 여기서도 테오도라의 개입과 축약은 이어진다. 배를 그리고 거대한 고래를 그렸다. 고래가 배를 뒤집었게 만들었고 커다란 바다거북을 그려 넣어 구르둘루로 하여금 꼬리에 매달리도록 했다. 운 좋게도 사라센인의 그물망에 걸린 거북이 덕분에 구르둘루는 모로코 해안에 안착했다. 아질울포는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해저(海底)를 걸어 모로코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부들의 말로는 소프로니아가 술탄의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술탄의 후궁들은 365명이라 1년에 한 번만 술탄을 영접할 수 있으며 또 한번 더 다행히도 오늘이 소프로니아의 차례였다. 아질울포는 술탄의 왕궁으로 잠입해서 소프로니아를 구출하여 추격하던 술탄의 호위병들을 겨우 따돌리고 생말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소프로니아는 아질울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전히 순결을 유지하고 있었고 술탄에 의해 순결을 잃을 위기의 순간에도 역시 아질울포가 있었다. 배는 생말로 향하고 있었지만 테오도라는 커다란 암초를 바다 위에 세워 배를 난파시켜 브로타뉴 해안에 그들을 떨궈 놓는다.


   테오도라가 아질울포와 그 일행의 여정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다시 아프리카에서 브로타뉴로 그리는 동안 토리스먼드는 성배 기사단의 비밀 야영지를 찾아 기독교 국가의 숲이란 숲은 죄다 뒤지고 다녔다. 쿠르발디아라는 외딴 지방의 한 마을에 들르게 된 토리스먼드는 한 농부에게 빵을 부탁했지만 농부는 성배 기사단의 과도한 공물 요구에 자신들도 먹을 것이 없다고 한탄했다. 마침내 성배 기사단의 소식을 들었다, 농부의 말로는 숲 속에 토리스먼드와 비슷한 옷을 입은 한 무리의 경건한 기사들이 단체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그들을 먹여 살리는 건 자신들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토리스먼드의 여정도 끝이 보이는 듯하다. 숲 속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내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토리스먼드는 자신이 성배 기사단의 아들임을 밝히며 그들의 삶 속으로 귀의하고자 했지만 그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성배를 숭배하는 이 집단은 신비주의에 쌓인 채로 하루 온종일 명상과 검술 훈련 그리고 정신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다. 마치 이슬만 먹고사는 듯 물아일체를 강조하는 이 집단의 선문답적 대화와 현실에서 몇 십억 광년은 떨어져 있는 듯한 관조적 태도는 이들을 광신적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보이게끔 한다. 토리스먼드는 한 동안 이들을 좇아 다니며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지만 현실을 초월한 듯한 이들의 태도에 점점 진절머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듯 물질을 멀리하고 영적 해탈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지만, 먹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매달 마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바치는 과분한 공물이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으며 이들의 안빈낙도를, 사실상 무위도식을 가능케 했. 공물을 받는 날이 되어 마을 대표들이 이들을 방문했고 그동안의 지나친 공물 상납에 자신들의 먹거리도 제대로 없을 지경이라며 이번 한 번만 상납을 면제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무자비했다, 그날 밤 뿔 나팔 소리와 북소리에 맞춰 마을로 진격했고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찌르고 집과 헛간에 불을 질렀다. 기사들의 무리 속에 있었던 토리스먼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냐는 질문에 그저 성배의 뜻이라고만 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토리스먼드가 말에서 내려 위기에 처한 노인을 구출해 주면서 그의 칼 끝은 성배 기사단을 향하게 된다.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마을 사람들을 전술적으로 조직하여 성배 기사단과 맞섰고 그의 활약으로 마침내 성배 기사단을 몰아냈다. 이제 토리스먼드는 쿠르발디아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의도치 않게 그들에게 어떤 존재의 의미를 선물한 것이다. 토리스먼드가 나서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으며 기사단의 억압과 속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토리스먼드 덕분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평등이란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토리스먼드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부유하던 존재의 의미를 붙잡아 마을 사람들에게 안겨주게 된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배 기사단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지만 자신의 손으로 손수 그 의미를 폐기시켜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함께 살자고 간청했지만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말을 남긴 채 그는 무작정 마을을 떠나 버렸다. 지금까지 오로지 성배 기사단 하나만 바라보며 모든 명예나 기쁨을 경멸해왔던 삶이었건만 이제 그 의미는 사라졌다. 이제부터 어떤 다른 의미가 그를 찾아와 그의 존재를 밝혀줄 것인가? 그렇게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는 떠돌다 브로타뉴 해안가의 동굴에 다다르게 된다.


   이렇게 테오도라는 아질울포와 소프로니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일행들의 여정과 성배 기사단을 물리치고 쿠르발디아 사람들을 구원한 후의 토리스먼드의 여정을 브로타뉴 해안가로 모이도록 그렸다. 아질울포는 소프로니아를 해안가의 동굴에 피신시키고는 소프로니아가 여전히 순결한 처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카룰로스 대제를 데리러 구르둘루와 함께 떠났다. 그 사이 누군가가 이 동굴에 나타난다. 바로 토리스먼드다. 동굴 속에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소프로니아가 잠들어 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는 대신 그녀에게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기의 충만한 세계에 대한 결핍은 부성의 상징으로 대체된 성배 기사단에 대한 동경으로 그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던 그 신비주의 집단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진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사라진 채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원수가 살해된 뒤 자신의 존재마저 해체당할 위기의 랭보에게 브라디만테라는 존재가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듯 이곳에서는 소프로니아가 토리스먼드를 다시 일으켜 줄 어떤 의미로 그에게 닿았다. 쉽게 말해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뛰는 심장을 어찌하지 못한다. 곧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소프로니아 역시 장성해버린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녀의 눈에는 하트가 반짝인다. 이제 상황은 독자들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재현으로 향한다. 서로를 원하는 두 남녀는 결국 한 몸이 되었고 그렇게 아침이 밝아 온다. 아질울포는 대제를 데리고 동굴로 향하고 있다. 대제는 처녀성을 확인하기 위해 산파까지 동행시켰다. 그렇게 도착한 그들 앞에 펼쳐진 장면은, 서로 몸이 엉킨 채로 잠들어 있는 나체의 두 남녀다. 두 연인은 호위병들에 의해 동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제일 먼저 터져 나온 소리는 아질울포의 안타까운 외침이었다, 당신... 소프로니아! 이 외침에 당연히 토리스먼드도 펄쩍 뛰었을 것이다, 당신이 소프로니아라고요? 오, 어머니... 토리스먼드를 알고 있느냐의 왕의 질문에 소프로니아는 이 젊은이가 토리스먼드라면 자신이 키운 아이가 맞다고 했고, 그녀의 이 대답에 또다시 사람들이 길을 떠난다. 토리스먼드는 수치스러운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자책하며 말을 타고 떠나 버렸다. 물론 아질울포도 마찬가지다, 토리스먼드를 손수 키웠다는 소프로니아의 대답에 절망한 그 역시 자신에겐 이제 더 이상 이름이 없다면서 말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이야기를 이런 식의 막장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근친상간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떠났던 토리스먼드가 되돌아왔다. 소프로니아와 동침했을 때 그는 그녀의 순결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가 될 수 없을 터였다. 이 의문을 소프로니아가 풀어 준다, 사실, 토리스먼드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왕인 아버지가 전쟁터로 나간 사이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이 나서 토리스먼드를 낳았다고 한다, 그 상대는 성배 기사단으로 추측된다. 왕이 돌아올 무렵, 파렴치한 왕비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어린 토리스먼드와 함께 자신을 숲으로 추방해 버렸으며 왕에게는 소프로니아가 사생아를 낳기 위해 도망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프로니아는 모녀 지간이라는 천륜을 거스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추문에 대하여 끝까지 비밀을 지켰으며 황무지에서 어린 토리스먼드를 낳아 키웠다고 한다. 아질울포가 베풀었던 원치 않았던 시혜로 인해 콘월 가문에 토리스먼드를 빼앗기고 강제로 수녀원으로 유배되어 서른셋이 된 지금까지 처녀성을 유지해왔건만 이런 그녀의 첫 경험이 근친상간이라니... 이번엔 토르스먼드가 나서서 왕을 비롯한 모두의 가슴을 쓸어내릴 해답을 준다, 근친상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 성배 기사단을 찾아 헤매던 중 듣게 된 비밀이 하나 있단다. 소프로니아는 왕비의 딸아 아니라 왕궁의 토지 관리인의 부인과 왕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이다. 왕은 그녀를 자신의 딸로 입적시켰고 그래서 토리스먼드의 친모인 왕비는 소프로니아에게는 계모가 된다. 이제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소프로니아는 왕의 사생아로서 왕비와는 관계없다. 토리스먼드는 왕비의 사생아로서 왕과는 관계없다. 즉, 소프로니아와 토리스먼드는 물리적으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인 것이다. 이제 토리스먼드는 정식으로 소프로니아에게 청혼했고 카를루스 대제는 기꺼이 이 결합을 축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존재의 지위를 상실한 아질울포다. 물론 왕은 그를 잊지 않았고 다시 그의 존재를 복권시켜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없다. 이번에는 랭보가 그를 찾아서 데려 오겠다며 나섰다. 말을 달려 그의 이름을, 그것도 온전한 그의 풀 네임을 부르며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다 다행히 그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따라간 흔적의 끝에는 흩어진 빈 갑옷과 투구만이 바닥에 뒹굴고 있을 뿐이다. 랭보는 땅바닥에 놓인 칼자루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이 갑옷을 루시옹의 기사 랭보에게 남기노라." 그 밑에는 반쯤 갈겨쓰다 만 서명(그렇다, 그에게는 더 이상 이름이 없었다.)이 남아 있다. 랭보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당신은 존재한다고,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갑옷을 모아 세워 보았지만 힘없이 무너질 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의지의 힘 하나로 버텼건만,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모든 임무를 완수했건만 왜 지금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일까? 랭보는 그의 갑옷을 걸치고 투구를 쓴 채 황제와 수행원들 앞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기쁜 마음으로 아질울포를 반겼지만 텅 비어있어야 할 그의 투구 속에서 랭보의 얼굴을 본다. 황제가 말한다, 네가 입은 갑옷을 욕되게 하지 마라, 그는 성격은 좀 까다로웠지만 훌륭한 군인이었다. 사라센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아질울포의 투구와 갑옷을 걸친 랭보는 누구보다도 더 맹렬하게 싸웠다. 그의 활약 덕분에 브로타뉴에 발을 들인 무어인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아질울포의 투구와 갑옷은 더 이상 번쩍이지 않았다.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적들의 피와 우그러지고 긁히고 칼에 베인 흠집 투성이었고 이제야 현실적인 갑옷으로 보였다. 그때 아질울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디만테였다. 랭보는 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말을 몰아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브라디만테는 감격에 겨워 외친다, 드디어 당신이 제게로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 그러고는 말머리를 획 돌려 도망간다. 하지만 다분히 의도적이다, 추격하기에 용이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지 확인하고자 계속 고개를 돌린다. 비탈길을 돌아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랭보가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을 때 그녀는 이미 갑옷을 벗고 황옥 색의 짧은 튜닉만 입은 채 이끼 낀 비탈 위에 누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백색 갑옷을 입은 채로 다가간 랭보는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그저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랭보가 그녀 위로 몸을 엎드렸을 때 그녀는 아질울포의 비존재를 확인하지 않겠다는 듯 두 팔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서로 비슷한 열정 속에서 둘은 하나가 되었다. 그래요, 전 언제나 확신했어요, 당신이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어요...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끝나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보이지 않아야 할 아질울포 대신 감각적 실재로 존재하는 랭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배신감에 눈물 가득한 눈으로 분노에 떨며 소리쳤다, 너, 이 비열한 사기꾼! 칼을 들어 랭보를 찌르려다 대신 칼등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랭보는 중얼거린다, 그래도... 말 좀 해봐, 좋았잖아? 그리고 그는 기절해 버렸다. 


   아질울포를 찾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빈 냄비나 굴뚝, 큰 통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안 쪽에 머리를 처박고 외친다, 주인님! 명령을 내려 주세요! 구르둘루가 긴 술병 주둥이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그 안에서 누굴 찾는 거지? 토리스먼드였다. 황제의 축복 속에 소프로니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쿠르발디아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이미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주인을 찾는 구르둘루를 자신의 하인으로 삼아 쿠르발디아에 도착했다. 성배 기사단이 사라진 그곳은 놀라운 생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토리스먼드 부부를 반겼다. 토리스먼드 역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카롤루스 황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았음을, 그래서 그들의 백작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이들 백성들도 존재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언제나 기사나 백작들에게 지배받고 복종만 하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토리스먼드라는 우연이,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밝혀 주었다. 토리스먼드와 함께 성배 기사단에 맞섰던 우연적 사건이 어떤 의미를 그들에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평등의 개념을 깨달았고 모두가 힘을 합쳐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말했다, 토리스먼드가 그들을 위해 해 준 일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살고 싶다면 살면 된다고, 다만, 자신들과 똑같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똑같이라고요? 그렇다고 한다. 백작 신분의 그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토리스먼드가 역설했지만 그는 잊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 이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그들에게는 불가능이란 말은 낯선 말이었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은 훌륭한 젊은이이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들을 경험했지요, 만약 우리와 동등하게 이곳에 살면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들 가운데 최고가 될 겁니다. 토리스먼드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프로니아가 나섰다, 자신은 너무나 많은 역경을 겪어 왔기에 이제 지쳤다고, 이곳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분별력이 있는 것 같으니 함께 머물자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인으로 삼았던 구르둘루는?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쿠르발디아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만큼 가질 것이다. 다시 토리스먼드가 반문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구루둘루와도 동등한 처지란 말인가요? 마을 사람들이 답한다, 그도 배우겠지요,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이제 테오도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테오도라는 마지막 부분을 너무 다급하게 썼다고 뜬금없이 고백한다. 그것은 어떤 분노와 뒤섞인 불안감 때문이었는데 그 연유를 오히려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누눈가는 그녀가 무언가를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테오도라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이제 수녀원을 향해 나 있는 험한 길을 올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수녀원 문 앞에서 그치고 곧이어 어떤 기사가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드리고는 물어볼 것이 있노라고 외친다. 그녀의 조그만 창문으로는 그 기사를 볼 수는 없지만 그 목소리는 바로 알아차린다. 그것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 여전사 브라디만테를 찾고 있는 바로 랭보의 목소리다. 문지기 수녀는 그런 여전사는 여기에는 없다고 했지만 테오도라는 서둘러 수녀복을 벗어던지고 황옥 색 튜닉과 갑옷, 정강이 보호대와 투구와 보랏빛 도는 청색 겉옷을 꺼낸다. 기다려요, 랭보, 나, 브라디만테가 여기 있어요! 지금은 테오도라라는 이름의 수녀 신분으로 글쓰기에 매진했던 그녀는 한때는 전장을 누비며 전투를 겪었고 사랑을 찾아 세상을 헤맸던 바로 그 브라디만테였다. 이 소설은 그런 그녀가 수녀원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며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해 쓴 어떤 기록인 동시에 하나의 반성(反省)이었다. 처음에 수녀원에 왔을 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절망했지만 그런 돌아 봄의 결과, 지금은 젊고 열정적인 기사 랭보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의 펜이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것도 랭보 때문이었을 것이다. 랭보를 만나기 위해 펜은 부지런히 달렸고 이제는 그가 곧 도착하리라는 것을 인지한 듯, 기다림의 조급함은 그녀의 펜을 독촉했다. 내가 달려간다, 랭보... 그녀는 원장 수녀에게 인사도 없이 수녀원을 나선다.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마무리되겠지만 사실 우리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거기에 삶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고 그 페이지가 책의 다른 페이지들을 움직이고 그것들과 뒤섞일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테오도라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녀의 펜은 멈출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페이지는 이 순간 그녀가 수녀원을 나서면서 부딪히게 될 모퉁이와 같다. 수녀들은 그녀가 수많은 또 다른 모험을 겪은 뒤 결국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알지만, 부유하는 수많은 의미들과의 우발적 접촉을 겪게 될 그때의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그녀, 또 다른 브라디만테로 귀환할 것이다.




   육체 없이 의식과 의지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와, 반면에 의식 없이 육체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평민 구르둘루... 이 두 극단의 존재는 우선 영혼과 육체라는 고전적 '심신이원론'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 칼비노는 표면적으로 이런 극단의 두 존재를 내세운 뒤 평범한 젊은이 셋을 내세워 관점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 버린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존재는 영혼으로 대변되는 '사유'라는 실체와 육체로 대변되는 '연장'이라는 실체 둘 뿐이다. 즉,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유와 연장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 두 존재의 변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칼비노는 이 소설을 통해서 '존재한다'라고 할 때 고전적 존재론이 추구하는 존재의 보편성과 공허한 추상성에서 벗어나서 구체적 실존으로서의 존재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존재라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때의 어떻게는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존(實存)의 한자적 의미는 실제로, 정말로 존재함이며 이 의미 그대로 실존을 바라본다면 이는 존재라는 추상성을 벗어나 현존재의 구체성을 실존론적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시도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라는 기표 Being(또는 독일어로 Zein)이 담고 있는,  "있다"와 "~이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는 영미와 유럽의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서구 존재론은 독특한 철학적 지위를 점하게 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추상적 보편으로 신격화되고 만다. 하지만 실존에 해당하는 이들의 기표 Existence(Existenz)는 반대로, 이것을 분절화시켰을 때의 Ex-Istence는 "Being(존재)으로부터 벗어남(Ex)"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탈-존재를 의미하며 공허한 존재의 추상성에서 벗어나서 구체적 존재자로, 특히 현존재로 돌아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아질울포는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이는 명명 행위가 주는 후광 효과에 기댄 심리 작용의 일환일 것이다. 다시 말해 명명 행위를 통해 존재가 드러날 것이란 기대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명명 행위 자체가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통해 존재를 보증한다는 것은 대상과 매칭되는 고유한 이름이 있다는 주장과 이름 자체는 그저 명목적인 수단일 뿐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고전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의 기호 철학은 이름과 존재의 일치성은 자의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증명했다. 그래서 이들의 표현대로 기표와 기의는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이 시가 현상학적 지평 위에 쓰인 시라고 주장되는 이유는 명명 행위가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기울임은 주체의 능동적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명명자의 자발적 의도를 담고 있는 표현인 동시에 존재가 숨기고 있는 의미를 까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그 이면에는 존재에게는 이미 고정된, 그래서 결코 변하지 않을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존재는 결코 변하지 않을 고유한 본질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의 다양한 외적 드러남이 현상이라고 하는 고전적 관념론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기에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입장을 빌리자면, 그는 주위 세계에 있는 사물들이라는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남을 합목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안경의 예를 들어 보자. 매일같이 안경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다시 말해 안경이란 존재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다 안경에 흠집이 생기거나 안경테가 부러지거나 하면 비로소 잊고 있었던 안경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즉, 사물이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이를 하이데거는 "눈 앞의 존재(Vor-Handensein)"와 "손 안의 존재(Zu-Handensein)"로 구분하는데, 너무나 친숙해서 그 존재가 망각된 "눈 앞의 존재(Vor-Handensein)"는 위의 예를 통해 비로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손 안의 존재"가 된다. 이때 이런 기울임을 배려(마음 씀)라고 한다. 비슷하게 인간으로 대표되는 현존재(Dasein) 사이의 이러한 마음 씀을 심려로 정의하고 이 배려와 심려가 바탕이 되는 염려(Sorge)를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 구조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배려되기 전의 꽃은 전혀 꽃으로 인식되지 않은 "눈 앞의 존재"였다가 이름을 불러주는 배려를 통해서 비로소 꽃이 된다. 다시 말해 존재가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기에 명명 행위 자체가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다. 아질울포가 그렇게 이름에 매달리지만 반대로 구르둘루는 너무나 많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잊힌다. 세상의 모든 이름을 부여받은 구르둘루는 "눈 앞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이름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스스로 존재이기를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어떤 의미로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동료 용장들에게는 융통성 없고 매우 귀찮은 존재로, 하지만 브라디만테에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거대한 사랑이라는 존재로 말이다. 물론 랭보에게는 자신이 따라야 할 완벽한 모범으로서의 위대한 존재였지만 토리스먼드에게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파괴한 빌런이기도 했다. 이렇게 드러나는 존재는 다양한 의미들로 발현된다. 그렇기에 존재의 드러남은 존재가 숨기고 있던 본질의 의미, 고정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존재 주위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며 맴돌고 있던 수많은 의미들이 비로소 존재와 맞닿을 때 그 순간 그것은 의미로서 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우연적 사건(Event)이며 그렇기에 그 사건은 추상적 보편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 된다. 그렇게 우연적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의미들은 다양한 개인들에게 드러나는 특정 존재자의 독립적 존재 양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주체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존재의 의미 밝힘이 아니다. 그저 존재자의 존재 의미가 개인에게 발현되는 것이고 그렇게 존재자는 각 개인들에게 독자적인 의미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아질울포가 브라디만테에게 충만한 의미로 존재하듯 브라디만테는 랭보에게 그렇다. 소프로니아 역시 토리스먼드에게는 충만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토리스먼드는 자신 스스로가 쿠르발디아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었음을 깨닫지도 못했었다. 드러남의 우연성은 개인의 존재 이유를 임의적으로 변경시킨다. 랭보는 아버지의 복수가 존재 이유였지만 브라디만테라는 의미를 만나는 순간 그것을 대체한다. 토리스먼드는 성배 기사단이 그의 전부였지만 소프로니아라는 의미에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 그래서 부유하던 의미가 존재에 닿는 순간 그것은 구체적 현실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을 우리는 실존이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존재(存在)에 관한 보편이 아니라 구체적 실존(實存)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의 이야기라면 수녀원의 문을 나서는 브라디만테의 미래는 결코 고정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열린 소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녀원의 문을 나서는 그녀의 미래는 부유하는 다양한 의미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점철될 온전히 열린 미래일 것이다. 브라다만테는 자신에게 열린 미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책을 열어둔 채로 마무리한다"오, 미래여, 과거 이야기에서, 격정적으로 내 손을 잡은 현재에서 떠나기 위해 난 지금 너의 말안장 위에 올라탔다. 아직 세워지지 않은 도시 탑 위의 깃대엔 어떤 새로운 깃발들이 나를 향해 꽂힐까? 내가 사랑했던 성과 정원에서는 어떤 폐허의 연기가 피어오를까? 네가 준비한 예상할 수 없는 황금시대는 어떤 것일까? 길들지 않은 너, 비싼 값을 치른 보석 같은 예감, 정복해야 할 나의 왕국, 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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