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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an 11. 2019

타자되기, 욕망과 체념의 변주곡

오르한 파묵: 하얀 성(Beyaz Kale)

하얀 성(Beyaz Kale)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문학동네




우리는 성을 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18 -


   저 멀리 녹음 위로 솟은 언덕에 자리 잡은 하얀 성...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 하지만 수 차례의 공략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 이 성은 정녕 난공불락의 성채인가? 아니다, 솔직해지자. 원정은 애초부터 성의 함락에 있지 않았고 제국의 궁정 내부에서 이루어진 정무적 판단에 따른 책략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번 원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호자의 개인적인, 하지만 원대한 욕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얀 성의 함락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호자는 동트는 새벽에 홀로 성으로 향했고 벤은 이곳에 남았다. 이제 둘은 서로의 타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얀 성은 호자와 벤의 삶이 교차되어 서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호자는 벤이 되고 벤은 호자가 된다.



  I.

   베네치아 출신의 주인공 벤(Ben: 소설은 일인칭 시점이기에 '나는~', '내가~'라는 전형적인 일인칭 화법으로 전개되지만 정작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나오지 않기에 터키어 일인칭 대명사 Ben으로 주인공을 지칭할 것이다.)은 나폴리로 항해하던 중 터키 함대를 만나 배가 침몰되는 바람에 포로로 잡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오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셋,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고 천문학, 수학, 물리학, 그림을 이해한다고 믿었던, 젊은 혈기에 자만심 가득 찬 젊은이였다. 터키군에 의해 배가 부서지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자신의 책들을 챙겼고 책들 중 해부학 관련된 책이 있어 그는 의사로 오인되어 파샤(오스만 제국의 군 지휘관)의 병을 좋게도 치료한 덕분에 비참한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노역 노예의 삶을 피할 수 있었다. 파디샤의 명령으로 '호자(이슬람 학교의 교사나 성직자)'라 불리는 어떤 터키인과 함께 파디샤(이슬람 제국의 지배자 또는 통치자, 소설에서는 메흐멧 4세라는 실존 인물)를 위한 불꽃놀이에서 사용될 새로운 화약을 개발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호자라는 이 사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벤과 닮은 사람이었다. 호자라는 사람은 서양 과학에 대한 열정적인 동경을 갖고 있었고 그 열정과 벤의 조력으로 둘은 파디샤의 만족을 뛰어넘는 화려한 불꽃쇼를 무사히 마쳤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벤은 고국으로의 귀환을 은근히 바랬지만 파샤는 무슬림이 되었을 때의 달콤함을 그려 보이며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종용한다. 이전에 포로로 잡혀왔던 서구인들 상당수가 개종해서 괜찮은 삶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벤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객기로 목이 날아갈 뻔한 순간까지도 개종을 거부했다. 그 객기란 것은 그냥 두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레 개종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외부에서 급작스레 강요된 협박이었기에 거부했던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을 그런 것이었다. 호자가 이런 객기를 눈여겨봤던지 그의 요청에 응하여 파샤는 벤을 호자의 노예로 선물했다. 쌍둥이마냥, 마치 거울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닮은 두 사람... 이때부터 둘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쌍둥이처럼 서로 닮은 두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 있다. 동양과 서양, 이슬람과 기독교, 즉 하나의 주류 문명과 또 다른 주류 문명의 대립과 충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문명은 서로의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할 수 없는, 그래서 서로 이단이었고 배척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의 정점에 있었다. 파묵의 소설 대부분이 중세와 근대 서구 문명사에서 양대 축을 이뤘던 두 문명,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을 주제로 하고 있다. 세밀화라는 미술 양식을 중심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두 문명의 충돌을 멋지게 보여 준 <내 이름은 빨강>을 필두로 <눈>, <새로운 인생>, <검은 책> 등이 모두 이 문명의 충돌이 배경이 된다. 그의 소설들이 이를 배경으로 하는 근거에는 터키란 나라 자체의 역사적, 지정학적 상황이 이런 충돌의 역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은 1,200년 가까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본산이었고 로마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터키를 차지하면서 이슬람 문명이 현재까지 터키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가 터키라는 나라에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곳이 유럽과 아시아, 즉 서양과 동양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터키의 역사는 곧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충돌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본다면 파묵의 소설들이 이 두 대립항의 충돌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파묵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하얀 성>은 파묵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두 문명의 충돌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독특한 차별성을 띤다. 다른 소설들에서는 두 문명의 충돌이 서구 기독교 문명의 침투로 인한 이슬람 내부의 분열과 충돌로 표출되는 스릴러의 형식을 띤다면 <하얀 성>은 두 문명의 충돌 자체를 중심에 두고 "정체성"이라는 고유한 철학적 영역의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배타적인 두 문명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측면까지도 건드리고 있다. 이슬람 문명을 대표하는 '호자'와 기독교 문명을 대표하는 '벤' 사이의 이상한 동거를 통해 충돌의 측면이 부각되지만 그 충돌의 시간이 점층됨에 따라 상호 애증의 관계가 성립되면서 외양의 유사성을 넘어서서 내면의 상호 화해로 이어져 종국에는 모종의 공모를 통해 서로를 넘어서는 타자되기를 보여 준다. 정체성에 관해서 보자면 다른 소설들이 터키 내에서의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에 관해서 고민하는 것이라면 <하얀 성>은 어찌 보면 서구 근대 철학에서 정의한 정체성의 문제 자체를 건드리는 동시에 이 철학이 규정하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부정하는 탈정체성의 차원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II.

   호자는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의 전형을 구현하고 있음에도 서구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동경을 품고 있다. 서구 기독교라는 이질성에 대한 적대성과 우월성이 그를  공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그 이면에는 선진 문물에 대한, 특히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학구적 열망이 그를 이끌고 있다. 어찌 보면 이슬람 전통의 전형성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변의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는 고고한 그의 기질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개인적 욕망도 함께 한다. 그 욕망이란 것이 어찌 보면 서구의 과학 문명을 그 자체로 진리로 바라보면서 이슬람이라는 정신적 하부구조 위에 서양의 선진 문물을 물질적 상부구조로 구축하고자 하는 그런 장대한 염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현상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질 줄을 모르는 자국의 사람들을 "그들", "바보들"이라고 스스로 갈라 치기를 한다. 반면에 서구 기독교를 대표하는 벤은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해양 시대의 강국 베네치아 귀족 집안 출신답게 근대 과학과 예술, 교양에 대한 적당한 이해와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해양 시대에 걸맞은 모험심을 탑재한, 근대 르네상스가 낳은 낭만의 전형을 구현하고 있다. 사실 의학, 지리학, 천문학 등 당시 서구 사회가 첨단을 달리던 과학 분야에 대한 얕고 넓은 지식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그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적절한 타협의 일환으로 호자와의 협업이 가능토록 했다. 호자는 벤의 그 적당한 지식 전체를 탐내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의 결과물이 파디샤를 위한 불꽃놀이였고 호자는 벤을 노예로 요청하여 그의 집에서 둘의 기나긴 동거가 시작되었다. 물론 시작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다. 하지만 겉모습만 닮았을 뿐 기질이나 살아온 지리적, 문화적 기반이 서로 완전한 타인인 둘 사이의 동거는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서로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아가게 되는 '서로 되기'의 서막을 열어젖힌다.


   벤도 그 시대의 젊은이들처럼 나름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온 후로는 스스로 타협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 그가 품은 새로운 꿈은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었다. 이슬람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팔이 잘린 채 고국으로 돌아온 세르반테스는 그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돈키호테>라는 걸작을 세상에 남겼고 벤도 어떻게든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곳 사람들에겐 신비하고도 이질적일 수밖에 없을 터키라는 이교도 세계에서의 경험을 글로 써서 성공하는 것이 그의 욕망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의 윗선과 통할 수 있는 유력자가 필요했고 그를 통해서 어떤 성과를 남겨 보상으로 자유인으로 풀려나는 것이 그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 따라서 벤에게는 어떤 '정치'가 필요했고 그렇게 다가온 호자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사이비 의사로서 노예들을 치료하면서 변변치 않은 뇌물을 챙겨 제국의 책을 사고 터키어를 습득했다. 반면 호자 역시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궁정으로 가야만 했고 그렇기에 그의 욕망에도 '정치'라는 것이 필수였다. 서양의 과학 지식을 통해 새로운, 획기적인 무엇을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파샤를 다리로 삼아 파디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렇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호자의 열정은 대단했다. 배가 난파할 때 벤이 껴안고 있었던 책들을 호자는 반년만에 이태리어를 습득하는 동시에 독파해버렸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고자 했으며 그 무엇을 벤이 알려주길 바랬다. 호자는 주변의 모든 현상에 '왜?'라는 물음표를 치면서 판단을 중지했다. 조수 간만의 차, 해수의 움직임, 붉은 개미의 조직적 활동, 개구리가 튀는 원리와 혈액 순환, 별들의 운행과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 달인 지 여부 등등, 모든 현상에 의문 부호를 쳤고 벤 역시 그에 걸맞은 답을 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고 함께 고민해야만 했다. 그런 의문과 고민의 결과물로 벤과 함께 새로운 우주 체계 이론을 보여 줄 모형과 매달 한 번만 시간 조정을 해도 되는 커다란 시계 톱니바퀴 장치를 개발했고 그것을 파샤에게 보여 주었다. 파샤는 시큰둥했지만 그 노력은 다행히도 파디샤에게까지 닿았다. 파샤의 주선으로 당시는 수렴청정 하에 있는 어린 파디샤를 알현할 기회를 잡았고 호자와 벤은 파디샤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을 신비한 장치와 책을 정성스레 만들었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는지 파디샤는 '왜?'라는 물음과 함께 관심을 보였고 궁전에서 대충 던진 예언이 운 좋게도 맞아떨어져 호자는 파디샤의 환심을 사게 된다. 그때부터 호자의 심대한 계획은 구체화되는데 당시 천문학은 자연스레 점성술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 호자는 궁정의 점성술사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천문 관측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파디샤가 허락했고 그때부터 호자와 벤은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는 동안 어린 파디샤를 두고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호자는 파디샤에게서 잊혀 갔다. 궁정의 암투로 인해 권력 지형도 바뀌었고 파디샤의 관심도 멀어진 채 호자는 여전히 '왜?'라는 질문만 던져야 하는 지루한 사색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사색과 기다림의 나날들 뿐이었고 이런 공허한 호자의 과업에 강제로 벤도 동참해야만 했다. '왜?'라는 호자의 질문은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질 줄 모르는 자신의 동포들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고 이제 호자는 그들을 '바보들'이라고 지칭하며 자신과 구분했다. 모든 것에 붙게 되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어쩌면 호자는 라이프니츠의 단자(單子, Monad)와 같은 것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기다림과 답이 없는 사색의 나날이 이어지면서 호자의 성마름과 권태는 점층된다. 사색의 중심에는 "왜?"가 있었고 이어지는 막연한 이 질문은 이제 호자 자신에게로 향하면서  "왜 나는 나일까?"라는, 서구 철학의 고유한 질문, 바로 "정체성"으로 어어지는 질문에까지 다다른다. 이 질문에 벤은 어떻게든 답을 해야만 했다. 벤은 그 질문이 궁정에서 불러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호자의 막막함과 권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노예로 붙잡고 풀어주지 않는 데에 대한 소소한 복수로써 벤은 엉뚱한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성찰이었고 방식은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는 "반성(反省, Reflection)"이었다. 처음엔 어찌 보면 그저 단순한 놀이였을 뿐이다. 아니,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극히 서구적인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어린 시절부터의 자신을 반추하는 것, 심지어 불경스럽고 추악한 것들까지도 반추해서 그것을 글로 쓸 것을 제안했다. 그때부터 둘은 책상 앞에서 서로 마주 앉아 자신들의 과거를 써내려 갔다. 쓰지 못하고 주저하는 호자를 달래기 위하여 벤은 자신이 보냈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써내려 갔으며 그 시절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소소한 부분까지도, 더 나아가서 만들어서까지도 과장해서 호자를 부추겼다. 몇 번을 썼다가 찢어버리기를 반복하던 호자도 결국 자신의 과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벤은 은자 같은 호자의 어린 시절을 알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과거를 교환하게 된다. 반성이라는 형식을 취한 벤의 목적은 단순했다. 호자로 하여금 유년기 시절부터의 자신의 과오를 기록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고 결국 벤의 우월성을 인정토록 하여 그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조금씩 진척되고 있다고 믿었고 곧 귀국하여 터키 제국에서의 체험을 어떻게 글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세르반테스적인 고민하고 있을 때 벤의 꿈을 좌절로 바꿔버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호자의 변심도 아니었고 외부의 어떤 압력도 아니었다. 단지 천재(天災)였을 뿐이었다.



   III.

   흑사병이 이스탄불을 덮쳤다. 이 재앙은 둘의 관계를 단숨에 역전시켜 버린다. 흑사병이 발발했을 때 호자는 마치 무슨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비극인 양 태연자약하게 바깥의 사태를 벤에게 묘사했다. 하지만 당장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이런 벤을 한심하고 가련한 눈으로 바라보던 호자는 '흑사병은 신의 벌이며 그것에 맞서는 것은 죄악'이라는 이슬람적 믿음을 바탕으로 벤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에 떠는 것이며 자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며 벤을 조롱했다. 이는 벤이 스스로 시작했던 반성 놀이의 결과였다. 호자를 흔들기 위하여 스스로 썼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의 과장된 과오는 호자에게는 그가 흑사병이라는 천벌을 받아야 할 마땅한 근거가 되었고 유년의 경험은 마지못해 썼을지언정 자신의 과오는 쓰기를 주저했고 결국 쓰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은 무죄라는 희한한 논리를 들어 흑사병은 자신을 비켜간다는 것이다. 벤이 흑사병을 피할 수 있는 예방책을 그렇게 떠들어대도 호자는 들은 채 하지도 않았고, 바깥에 나가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만지고 와서는 킬킬거리며 벤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 의도적 접촉을 감히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벤은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고, 더 나아가서 이번에는 반대로 호자 쪽에서 역공을 펼친다. 흑사병이 번지고 있는 바로 이때야말로 "왜 내가 나인지"를 써야 할 때라며 마주 앉아서 무엇인가 써야만 한다고 했다. 마지못해 뭐라도 써야만 했던 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잠잘 동안 꾸었던 행복한 꿈들을 시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기록해 나갔다. '왜 나인가'는 쓰지 못하고 왜 다른 사람들은 왜 그들인가만 쓰면서 여전히 변죽만 울리고 있던 호자는 벤이 쓴 꿈의 기록에 조금씩 관심을 가졌고 꿈 이야기를 할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 표정에서 벤은 흑사병에 대한 호자의 태연한 태도가 조금씩 흔들린다는 것을 간파했고 호자가 그를 만지려 할 때마다 호자가 벤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무지함을, 호자가 쓰다 만 글들을, 그가 읽었던 벤의 행복한 꿈의 기록들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호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벤은 자신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고 호자를 자신의 방향으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뜬금없이 들어온 혼인 제의에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호자는 상대가 과부란 핑계를 들어 거부했다. 이에 중매쟁이는 호자도 그렇게 내세울 게 없다면서 호자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 버린다.  쌍둥이 형제라는 말로써 벤과 그를 함께 엮어 이교도로 매도했고 자연스레 흑사병이 호자로 인한 신의 벌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이제 호자는 다시 '그들', '멍청이들'을 외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여기에 더하여 호자의 배에 벌레에 물린 듯 한 반점이 생겨났다. 실제 벌레에 물린 것인지 아니면 흑사병으로 인한 임파선 종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기에 벤은 더욱더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호자는 즐겼다. 웃옷을 벗고는 가까이 눈으로 확인해보라 했고 직접 만져보라고까지 했다. 벤이 주저하자 종기를 만진 손을 벤의 얼굴에 가져다 댔으며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벤을 조롱했다. 하지만 상황은 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호자는 두려워했고 기어이 '죽음이 두려워'라고 실토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때 호자의 감정은 실토로 인한 부끄러움보다는 왜 자기만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벤에게도 종기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웃옷을 벗도록 했고 벤을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둘은 반라의 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보르헤스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p13)'라고 언급한 바 있다. 거울은 하나를 둘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거울 없이 마주 보기만 해도 이미 마을 사람들이 쌍둥이라 부르는, 하나같은 둘을 볼 수 있는데 이제 거울 앞에 섰을 때 하나는 넷으로 증폭되었다. 게다가 거울 속의 호자는 벤의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벤이 머리를 쓸어 넘기자 거울 속의 호자도 쓸어 넘겼고 두렵지 않은 억지 표정도 따라 했다, 심지어 벤의 공포까지도... 이제 넷은 하나였고, 아니 하나여야 했고 순간 벤은 거울 속에서 자신이 되어야 할 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호자도 자신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벤은 느꼈고 종국에는 둘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밖엔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죽을 거야... 호자가 말했다, 그리고 실토했다. 처음부터 흑사병이 두려웠다고... 어쩌면 이 실토는 벤의 실토일지도 모른다. 호자는 자신이 벤이 되었고 그렇기에 그의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았다고 한 것은 흑사병에 대한 벤의 공포였다. 그 두려움을 알았고 이젠 반대로 그 두려움을 다시 벤에게로 전이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벤은 생각했다. 호자가 말하는 단어나 대상은 모두 같았다. 다른 유일한 것은 두려움, 아니 두려움을 경험하는 방식이었다. 그 방식을 정확하게 어떤 거라 표현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거울 앞에서 행하는 또 다른 어떤 새로운 놀이였다. 호자는 말했다, 벤이 떠나온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오랜 시간 동안 책상 앞에 마주 앉아 호자에게 말해 주었던 자신의 유년과 청년 시절의 모든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고 이미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벤은 이런 터무니없는 호자의 상상이 상상만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미약하게나마 인정하는 자신이 두렵기도 했다. 처음으로 호자의 인생에 더 심오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벤은 느꼈다. 동이 틀 때까지 호자는 별과 죽음에 대해서, 우리와 그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자신에 대해서 떠들다 잠이 들었다. 벤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공포를 느꼈다.


   비단 흑사병으로 인한 공포만이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선 쌍둥이의 공포, 그렇게 서로의 삶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터무니없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날이 밝자 벤은 대충 물건을 챙겨 무작정 도망쳤다. 그가 도망간 곳은 헤이벨리 섬이었다. 호자는 그를 찾으러 오지 않았고 며칠 간의 평온한 삶이 이어졌다. 아마도 호자는 흑사병으로 죽었나 보다, 사실 그는 그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아침, 호자를 느꼈고 눈 앞에 그가 서 있었다. 벤은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겼다. 어쩌면 그렇게 그가 나타나 주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에게 호자는 독감으로 며칠을 앓아누웠으며 그 때문에 당장 그를 찾으러 가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중요한 일이 있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부탁했다. 흑사병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천재는 호자에게 또 다른 반등의 기회를 부여했다. 호자는 파디샤 앞으로 불려 나갔고, 흑사병은 신이 내린 벌이기에 여기에 맞서면 신의 뜻을 거역하는 거라면서 반대하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파디샤는 흑사병을 몰아내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명했다. 벤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흑사병 관련된 역학 및 통계 조사, 그에 따른 예방책 수립은 벤이 담당했고 그 결과 수행되어야 할 조치는 호자가 파디샤를 만나 놀라운 언변으로 파디샤로 하여금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거리의 소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위험한 조치라도 가능토록 만들었다. 적절한 예방 조치와 시장 통제 결과 흑사병은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꼼꼼한 통계를 바탕으로 벤은 그것이 완전히 물러나는 대략의 시기를 예상했고 파디샤 앞에서 호자는 그 시기를 예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흑사병은 더 이상 발발하지 않았다. 드디어 호자의 승리, 아니 호자와 벤, 둘의 승리가 도래했다.



   IV.

   호자는 마침내 왕실 점성술사의 위치에 올랐으며 이전의 왕실 점성술사였던 무리들이 완전히 물러났기 때문에 실제 그 이상의 실권을 휘두르게 된다. 호자는 매일 궁정에 나가서 파디샤와 함께 했다. 15년 동안 벤과 호자가 꿈꾸어왔던, '학문' 또는 '거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디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 이제 승리가 눈 앞에 왔고 그의 야망에 성큼 다가섰다. 그의 목표, 이슬람 정신의 하부구조에 서구 문물의 상부구조를 세우는 것. 이것이 터키의 몰락을 막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파디샤와 함께 하면서 이 야망을 위해 천천히 파디샤의 관심을 그들의 학문으로 끌어들이는 것, 꿈 해몽을 통해 다양한 관심을 유도하고 서양과 비교하면서, '우리'와 '그들'을 계속 언급하며 왜?라는 질문을 하도록 파디샤를 유도했다. 종국에는 이교도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이끌어냈고 호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가 이전부터 그리고 있던 신무기의 개략도를 그려 주었다. 궁정에서의 이 모든 이야기를 집에 돌아오면 호자는 때로는 들떠서, 때로는 그 바보들을 성토하며 벤에게 모두 이야기했고 스스로의 확신과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이번에는 벤 측에서 어떤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어찌 보면 형제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흑사병을 몰아내는 일도, 아니 그전부터 15년 동안 호자만의 승리가 아니라 그들의 승리를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책상 앞에 함께 마주 앉았던 그 시간들을 어찌 호자는 외면하고 자신만의 승리인양 말하는 것일까? 사실 벤은 헤이벨리 섬으로 도망쳤을 때부터 세르반테스가 되는 자신의 목표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돌던 밤, 반라의 상태로 거울 앞에 함께 섰을 때부터 이미 체념은 시작되었다. 베네치아로 돌아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15년이라는 세월은 어머니를 이미 저 세상으로 보냈을 것이고, 약혼녀는 가정을 꾸렸을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 그들이 자신의 꿈에 나오는 횟수 역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나마 줄어든 꿈속에서 나타난 그들은 베네치아가 아니라 여기 이스탄불에서 그와 함께 있었다. 이제는 베네치아로 돌아가더라도 도중에 중단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이젠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벤은 그렇게 느꼈다. 더불어 호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미 달라졌음을 느낀다. 때로는 과할 정도의 자신감으로 충만해 행복해하는 호자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과장된 승리감에 도취되어 끝없는 계획을 쏟아내고 곧 파디샤를 손아귀에 쥘 거라 확신하는 그가 좋았고 심지어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았다. 체념, 좌초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으로 대체된다, 벤은 호자가 되고 싶었다.


   사실 호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숨겨진 형태로 드러난다. 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호자의 욕망, '학문'이든 '거대한 계획'이든 어떻게 부르더라도 그것은 처음부터 구체성을 상실한 맹목적인 신기루라는 것을... 호자는 자신이 파디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유분방한 파디샤의 성향과 궁정의 암투, 국제 정세가 뒤섞인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거대한 계획의 실행을 파디샤가 곧 지원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파디샤의 용단은 뒤로 미뤄지기만 했고 둘은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다시 지난한 기다림과 거기에 뒤따르는 권태가 반복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학문' 또는 '거대한 계획'은 계속 재고되고 새롭게 첨삭되기를 반복했고 호자의 조울도 그렇게 반복되었다. 즉, 실체가 없었다. 어찌 보면 애초에 호자의 '왜'라는 질문 자체가 서양이라는 이질적 세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에서 비롯된, 답이 존재할 수 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라이프니츠의 단자와 같은 헛된 해답일지도 모른다. 답이 없을 질문, 닿을 수 없는 신기루, 그 모호함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호자는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주변을 맴돌 뿐이었고 어떻게든 실체를 부여잡기 위해 이교도를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신무기라는 또 다른 환상을 쥐어짜 냈을 것이다. 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호자도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호자는 확신을 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벤은 "호자와 함께 하기 위하여" 무색의 그 환상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벤은 실감하고 있었다. 한때는 벤이었던 사람이 그를 떠나버렸고, 한구석에서 졸고 있는 벤은 마치 잃어버렸던 열정을 다시 찾기 위해 호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무의미한 일에 이번에는 벤이 호자가 되기 위하여 헤어날 수 없는 심연을 함께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호자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디샤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학문' 또는 '거대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호자는 벤에게 '우리'의 몰락과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벤은 기뻤다, '우리'가 다시 함께 한다. 그래서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벤은 기쁘게 그 수정 작업에 동참했다. 둘은 몰락에 대한 슬프고도 무시무시한 글을 담은 책을 만들었고 그것을 파디샤에게 제출했다. 한 달 후, 적들을 혼비백산케 할 그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또 한 번의 승리가 도래했다. 벤과 호자는 열정적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화약과 폭탄을 이용한 시범을 파디샤에게 보여줘야 했다. 함께 준비했지만 현장에서의 실무는 벤이 담당했기 때문에 동원된 모든 인부들은 실무에 관해서 벤에게 문의하고 벤의 지시를 따랐다. 자연스레 벤이 무기 제작의 총책임자로 보였고 파디샤도 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파디샤는 벤과 호자를 동시에 불렀다. 호자는 처음에 떨떠름하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벤은 오래전 어린아이 때의 파디샤를 알현한 적이 있었지만 두 번째 그를 봤을 때 그는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파디샤도 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자가 이뤄낸 모든 성과가 벤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모든 성과를 벤에게로 돌리면서 호자를 질투하게 만들었다. 며칠을 함께 궁정으로 나가면서 파디샤는 둘의 유사성을 관찰했고 구분했고 시험도 했다. 제삼자의 위치에 서서 파디샤는 상호 유사성의 또 다른 놀이를 즐기고 있다고 벤은 느꼈다. 호자가 처음에는 사고를 할 줄 아는 아이라고 기대를 품었던 파디샤를 호자는 이제는 다른 여타 터키인들처럼 궁정의 암투나 사냥이나 즐기는 바보 같은 '그들'이라고 분개했다. 하지만 벤은 파디샤의 다른 측면을 보았다. 느긋하고 유희를 즐기며 특히 둘을 구별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히 그들을 섞어버리는 그의 의도된 놀이를 벤은 보았다. 하루는 호자와는 전혀 닮지 않은 궁정의 광대에게 호자의 흉내를 그대로 내게 만듦으로써 호자를 크게 흔들어버린다. 다음날부터 호자는 병을 핑계로 궁정에 발을 끊어버렸고 이제 벤이 궁정에서의 호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매일 궁정에 나가서 파디샤의 꿈을 해석하고 궁정의 모든 만찬에 참석하고 베네치아를 포함한 여러 외국에서 온 대사들이나 고위급 관료들을 만나고 적당히 지어낸 제국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흘리는 등, 벤은 완전히 호자의 삶을 대신하며 기름진 고기와 술, 여자와 향락으로 점철된 나날들에 절어 있었다. 이제 벤에겐 베네치아보다 이스탄불이 더 친근하고 편안한, 마치 자신이 태어난 고향 같다고 느껴진다. 반면에 호자는 집에 틀어박혀 지독스럽게 무기 개발에 열중했다. 예전에 호자의 지시로 집에 틀어박혀 끊임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했던 벤처럼 이번에는 호자가 예전의 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벤이 궁정의 향락에 찌들어가면서 스스로를 만족하고 있을 때 호자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말도 안 되는 그 무기를 점점 구체화시키고 있었고 그것은 '악마적인' 어떤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호자가 구체화시킨 그 거대한 계획은 집채만 한 검은 괴물로 실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이 완성되었음에도 파디샤는 원정을 나가면서 그 괴물과 동행하지 않았다. 장거리 원정을 나갔던 파디샤는 이스탄불로 돌아오지 않고 에디르네 시에 머물러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원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냥을 나갔다는 세간의 말을 믿어야 할 처지였다. 호자는 시간을 벌었다며 무기의 개선에 힘을 쏟았고 파디샤의 부재로 별 할 일도 없었던 벤도 의례적으로 그 작업에 동참했다. 그러나 호자는 곧 지쳐 버렸고 또다시 기다림이라는 예의 그 무기력에 빠졌다. 다시 예전처럼 둘 만의 밤이 반복되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이번에는 둘 다 별 말도 없었고 서먹서먹했다. 쌍방의 격렬함이나 긴장감도, 애절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호자가 말했다, 벤은 변했다고... 순간 벤은 어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없었다. 살찐 몸이 보여주듯 이미 나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그는 이스탄불에서의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벤은 꿈을 꾸었다, 가면무도회의 꿈이었다. 저기 멀리서 어머니와 약혼녀가 가면을 벗으며 그에게 손을 흔든다. 그도 반가워 그들에게 가려한다. 하지만 가면으로 그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 뒤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호자다. 벤은 이번엔 호자에게 아는 체하려 한다. 하지만 호자는 그를 무시하고 어머니와 약혼녀 쪽으로 간다. 그러면서 호자가 가면을 벗었을 때 벤은 가면 속에서 젊은 시절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V.

   마침내 파디샤가 에디네르로 무기와 함께 그들을 불렀다.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줄로만 알았던 호자는 알게 모르게 계속 무기를 보강하고 있었다. 이제 25년 동안 준비했던 거대한 계획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괴물은 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디네르로 느릿하게 가는 동안 호자의 예의 그 열정이 되살아났고 둘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었다. 가는 내내 호자는 전투에서의 무기 활용에 대하여 벤과 논의했고 다시 '그들'과 '우리들'을,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기회'에 대해, 역사의 흐름을 두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역설했다. 호자는 예전처럼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에디네르에 도착했을 때 무기는 파디샤와 주변 몇몇만 제외하고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파디샤는 호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전투가 개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파디샤는 예의 그 느긋함으로 하루 또 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러던 늦여름 갑작스레 폴란드 원정이 결정되었고 괴물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행군 대열을 배치할 때 괴물의 위치는 배제되어 있었고 병사들도 함께 동행하기를 주저했다. 파디샤 주변의 여러 정파들은 질투와 책략으로 그 괴물을 비난했고 병사들은 이 거대한 솥뚜껑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기에 곁에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 저주스러운 괴물의 탄생에는 순진한 호자와 파디샤를 꼬드겨 그 오랜 기간 동안 준비토록 만든 벤이 배후에 있다고 모두들 믿고 있었다. 무기를 저주로 바라보는 배경에는 전쟁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도 기인한다. 이들은 어떨 때는 적보다 불운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불운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을 벤은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파디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고 호자는 이런 태도를 놓치지 않았다. 호자는 궁정 점성술사인 자신의 지위를 십분 발휘하여 하루 동안 있었던 매우 소소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해석을 가하여 특정한 징조로 해석하고 예언을 펼침으로써 파디샤를 또 다른 방식으로 사로잡았다. 무기 제작 허락을 받아내기 위하여 썼던 몰락의 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며 공포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최종적 승리의 희열도 맛보게 하여 매일 밤 파디샤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그들'과 '우리들', 그리고 우리 머리 내부에 관한 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언급했을 때 파디샤는 즐거움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단지 공포심을 주려고 했던 이야기와 우리 머릿속에 관계된 동화를 파디샤가 믿는 것을 보고 벤은 슬펐다.


   하지만 벤은 더 사악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파디샤는 군대를 대동하여 사냥 여행을 나섰고 폴란드 지역의 기독교 마을에 다다랐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멧돼지와 사슴을 몰도록 했지만 정오가 될 때까지 한 마리의 동물도 보지 못했다. 한낮의 더위와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파디샤는 호자에게 매일 밤 그가 들려주었던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여기서 호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 '그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대해 언급하고는 마을의 한 노인을 붙잡아 통역관에게 무언가 질문을 시켰다. 이것을 본 벤은 어떤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네 인생에서 저질렀던 가장 큰 죄, 가장 사악한 짓은 무엇이었느냐? 노인은 유년기부터 자신들의 죄를 실토할 것을 강요당하기 시작했고 당황해하며 주저하는 노인에게 폭행이 가해졌다. 그는 마지못해 사소한 죄 몇 가지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호자는 그것보다 더 중대한 죄가 있다며 그를 몰아세웠고 차례차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속죄를 강요했다. 벤이 파디샤를 보았을 때 파디샤도 호기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매일같이 이 속죄 놀이가 반복되더니 언제부터인가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이 되어 버린다. 벤은 두려웠다. 바로 호자를 구슬리기 위해 자신이 벌렸던 반성의 놀이가 지금은 호자에 의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그것은 폭력적이었고 강제된 반성이자 강제된 속죄였다. 마을 사람들이 실토한 죄는 대부분 비슷했다. 사소한 거짓말, 작은 속임수, 한두 가지 비열한 사기나 배신 행위, 아니면 대부분은 좀도둑질뿐이다. 그러나 호자는 그들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근거에는 한때 벤이 그에게 더 심하고 더 많은 것을 고백했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자는 그들을 우리와 구분하는 더 심각하고 실제적인 죄가 있다고 믿었고 '그들'과 '우리'를 드러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무력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자는 무기를 넘어서서 이제 자신의 욕망의 근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었고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호자는 무기의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희망으로서의 무기였지만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또 다른 방식으로서의 근원 찾기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그 의식에 병사들도 죄책감에 주저하기 시작했고 장군들도 불평했으며 파디샤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다. 무엇보다 밤마다 승리, 미래를 외쳤던 호자의 지칠 줄 모르던 그 열정도 한 풀 꺾인 듯했다. 그리고 호자가 벌인 이런 사악한 놀이 역시 벤이 사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의 사냥 여행은 없었고 군대는 돕피오 성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무기는 원정에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둔하고 무시무시한 움직임은 행군 속도를 떨어뜨렸고 불만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무기는 짐만 될 뿐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무기가 진흙탕에 빠져버렸을 때에는 마지막 희망마저도 확실히 꺾여버렸다. 그 괴물이 진흙탕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호자 혼자 그것을 건지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파디샤가 보낸 보조 병력을 통해 겨우 무기를 진흙탕에서 건져 냈지만 이 무기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호자도 그의 실패를, 아니 호자와 벤의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미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린 무기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 돕피오 성, 심지어 이방인들을 상대로 벌인 속죄의 놀이, 이 모든 것이 이교도이자 이방인인 벤이 사주하여 벌인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다. 성의 함락은 요원했고 벤이나 호자는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서양의 신문물에 대한 호자의 동경은 그 근원을 알고자 했고 집요하게 그것을 파헤쳤다. 그리고 "왜 나는 나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고 이 질문에 자신도 답을 할 수 없었던 벤은 장난 삼아 반성 놀이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호자에게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는, '우리'와 '그들'을, 그 차이의 근원을 통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근원을 파헤치기 위한 허망한 노력은 어떻게든 결실을 봐야 했고 그것을 위한 호자의 열망은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의 승리와 '그들'의 멸망이라는 명분이 될 구체화된 실체로서의 무기가 최종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 무기라는 것은 이미 체념된 열망일 뿐이었다. 찾을 수 없을 질문의 답을 가장한 결과물... 그것은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고 둘은 그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체념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진정한 체념의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체념의 긍정이다. 타자되기, 서로가 서로 되기, 정체성을 넘어서기... 그날도 돕피오 성 점령에 실패했고 파디샤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늦은 밤 파디샤의 막사로 간 호자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호자가 파디샤의 막사에서 처형당했거나 아니면 막사를 나와 바로 돕피오 성으로 넘어가버렸을 거라고 벤의 상상이 다다랐을 무렵, 마침내 호자가 나타났다. 매우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온 호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저 밖에 안개가 자욱하다고만 했다. 벤은 바로 이 말뜻을 이해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벤은 자신이 고국에 두고 온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집과 마을, 가족들, 그들의 버릇, 신체적 특징까지 죄다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이제 그들은 침착하게 서로 옷을 바꿔 입었다. 벤은 호자에게 반지와 오랫동안 감춰 두었던 메달을 건넸고 호자는 말없이 그걸 목에 걸었다. 그리고 천막을 나섰고 벤은 안갯속으로 점차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주위는 점차 밝아졌고 잠이 쏟아졌다. 벤은 호자의 침상으로 들어가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VI.

   결국 호자는 하얀 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베네치아로 향했을 것이다. 벤은 호자의 자리에 남았다. 이제 둘은 서로의 삶을 바꿔 서로의 타자가 되었다. 호자가 벤은 궁정의 암투를 피해 은퇴를 택했고 칩거에 들어갔다. 사이 결혼도 했고 아이도 보았으며 그렇게 평범하고 잔잔한 노후를 보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을 진짜 호자라고 여기며 벤의 존재를 스스로 잊어가고 있을 무렵 그에게 어떤 여행객이 찾아왔다. 그리고 여행객으로부터 이슬람의 나라로 납치되었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경험담을 써서 베네치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어떤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벤은 다시 호자를 떠올렸고 그가 한때 자신이었던 누군가의 꿈을 그렇게 하나하나씩 실현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체념 후의 삶은 매우 아늑하고 평안하다. 젊은 시절의 열망도 한낱 순간일 뿐이리라. 그는 이제 타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그 타자는 이미 벤의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은 호자라는 타자인 동시에 벤 자신일 것이다.


   파묵이 후기에서 언급했던 대로 둘의 관계는 어쩌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일지도 모른다. 비록 호자가 데리고 있는 노예로서의 벤이었지만 호자는 자신의 모든 사고 실험을 벤에 의지했다. 하지만 호자와 벤은 노예의 변증법을 벗어나 있다. 예속이 실제로는 주인이 노예한테 의지하는 예속임을 노예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추후 각성을 통해서 그 사실을 깨치는 것이 인정투쟁으로 이어지는 헤겔의 논리이겠지만 벤과 호자의 경우라면 양상이 다르다. 벤은 비록 노예라는 위치에 존재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호자를 리드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노예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노예로서의 벤은 처음부터 이미 각성된 노예였다. 역시 파묵이 언급한 것처럼 호자와 벤의 충돌은 인정투쟁의 양상이 아니라 상호 애증의 관계로 점층되면서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를 원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애증의 관계는 반목과 충돌이 반복되면서 점차 욕망의 대체를 지향한다. 그리고 대체의 순간에는 언제나 체념의 긍정이 수반된다. 이런 식으로 욕망과 체념이 번갈아가면서 대체된다. 그렇기에 변증법이 아니라 '변주'일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이 아니라 욕망과 체념의 변주다. 욕망과 체념, 이 두 항은 결코 지양을 지향하지 않는다. 서로 번갈아가며 나타나기, 그것도 갑자기 예상치 못하기 나타나기, 그렇게 서로를 교차시키며 자신을 드러내기, 그러다 양보할 때는 알아서 물러서기, 정체성을 넘어서는 탈주로서의 타자되기... 체념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체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체념과 욕망은 서로 번갈아가며 대체된다. 지양이 아니라 서로 물고 물리며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는, 타자를 생산하는 변주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의식과 존재를 동일시함으로써 불변의 논리적인 자아를 정립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논리적인 자아가 지워버린 '기억'이란 요소를 통해 시공간 내에서 경험되고 형성되는 자아 또는 인격에 착목하여 <인간 오성론>에서 자기 정체성을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한 인격'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이러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잘 버무려서 적극적인 근대적 주체를 확립했고 이후의 서양 근대 철학사는 자기 완결성을 담지하는 주체가 되었든 선험적 의식이 되었든 변하지 않는 고유의 속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렇기에 나는 나일 수밖에 없는, 그 자체로 나를 증명하는 불변의 그 무엇을 상정하게 되고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자로서의 타자를 상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체성이라는 것이 과연 불변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하얀 성>에서 파묵은 정체성에 대한 근대의 서구적 정의를 부정하고 있다. 실제로 정체성이란 것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규정되고 재정립된다. 피란델로는 소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브런치 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타자들로서 존재한다 참조)>에서 자기 정체성은 철저하게 타자가 규정하는 정체성이라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이런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자기 정체성은 고정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개념 정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얀 성>은 호자와 벤이라는 외양이 서로 닮은 두 인물의 대립 속에서 반복되는 욕망과 체념의 변주를 통한 타자되기를 보여줌으로써 생성되는 정체성, 새롭게 태어나는 정체성을 예시하고 있다. '타자되기'는 단순히 서로 쌍방의 삶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교환이라면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상대방의 정체성을 취한 것, 즉 정체성의 등가 교환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정된 정체성의 틀 내에 있는 것이다. 호자나 벤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부대끼는 과정에서 이미 수많은 정체성의 변화를 겪었다. 체념의 순간에 정체성은 새로 태어나고 욕망은 정체성을 구체화한다. 그렇기에 서로의 욕망과 체념이 서로 변죽을 울리며 교차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탄생하고 서로의 정체성이 교환되며 그런 변주의 최종 결과 서로 타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 타자가 곧 자신임을, 동시에 타인임을, 다시 말해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되는 정체성을 여전히 체험하며 그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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