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그중에도 슬픈 감정은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괴로움, 힘듦, 공허, 외로움, 이별, 질투, 후회, 상처... 뭔가 슬픔을 한아름 품고 있을 법한 감정은 끝끝내 감추고 싶다. 부모님이나 연인,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굳이 슬픈 감정을 드러낸다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질 리 만무할뿐더러,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른 흐트러진 마음을 밖으로 드러낼 용기도 없었다. 혼자 끙끙대며 버티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나라고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반대로 마음속 감정을 오롯이 들여다보는 일을 무척이나 거북하게 느꼈다. 나의 치부를 고작 내게 드러내는 일인데도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은 나에게도 드러내기 싫은 감정이었던 모양이다. 슬픔을 품은 ‘못난’ 감정을 선택적으로 외면해온 이유였다.
하지만 슬픔이란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기는커녕, 나도 모르는 새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홀로 숨어 있다가 갈수록 선명해져 갔다. 그러다 가끔씩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슬픔을 품은 못난 감정은 애써 외면한 채 슬픔이 아닌 잘난 것들로 덮어낸다고 해서 지워지는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종으로 내려오고 나서는 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아무래도 서울의 번잡한 환경에서 벗어나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마련된 덕분인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에 다가가 본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마음 안에 참 많은 감정들이 쓸쓸히 방치돼 있었구나, 깨닫는다. 오랜 시간 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감정들에 쌓인 먼지를 닦아낸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감정의 모습이 드러난다. SNS에서 비치는 열정 넘치고 화려해 보이는 모습도, 직장인이 된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상처만 주는 인간 관계, 해도 고민이고 안해도 고민인 연애, 나의 미래를 보장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 회사일에서 비롯된 무수한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각자의 방 안에 살고 있었다. 크게는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외로움,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언젠가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공포와 허무,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무너져버리는 유약함.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나가는 것에 보내는 시기심. 모두 살아 숨 쉬는, 날 것의 감정이었다.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아픔 속에는 더 깊은 아픔이 존재했고, 외로움 속에는 더 깊은 외로움이 묻어났다. 감정에 메마르다 못해 짜내고 짜내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건조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다만 내 마음속 감정을 알아채려는 깊은 생각 없이 살아왔던 것이었던가.
물론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못난 감정이 갑자기 잘난 감정으로 변하지 않음을 잘 안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감정들은 드러낼수록 더욱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여태껏 이 감정들을 외면해왔던 것도 어쩌면 버티기 위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고육책이었을까.
하지만 앞으로는 외면해온 감정들을 모른 채 살고 싶지 않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음을 아님을 알기에, 외면해온 감정 또한 결국 내가 감당할 몫이기에 보듬어주고자 한다. 아픔을 알기에 나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게 가능하고, 외로워보았기에 함께 있음을 감사할 수 있고, 괴로워보았기에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마음이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을 거라는 확신은 결국 작은 흔들림에도 스스로를 무너지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슬플 때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를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는 점을 잘 안다. 내가 할 일이라면, 오랫동안 버림받아왔을 내 마음들 옆에 그저 서 있어 주는 게 아닐까. 힘들어하는 친구 옆자리를 묵묵히 지켜주는 것처럼, 차가워져 있을 마음에게 손을 꼭 잡아주며 "그동안 힘들었지" 따뜻한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다. 바꾸려고 하거나 다그친다면 버림받았던 감정은 더 도망가 버릴 거다. 더 깊이 숨어버릴 거다. 살다 보면, 그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아직도 차가운 방 한편에 문을 잠근 채 쓸쓸히 앉아 있을 나의 감정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의 마음에게 '똑똑' 문을 두드려 본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본다. 상처투성이인 내 마음은 쉽사리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답이 없어도 괜찮다. 나는 옆에 서서 기다리겠다. 다시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슬픔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