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헬스를 시작하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온다. 지독히도 나를 괴롭힌 종목은 바로 턱걸이였다. "회원님, 턱걸이는 턱 운동이 아니에요. 등으로 당겨야 해요, 등!" 대롱대롱 봉에 매달려 끙끙댈 때면 트레이너는 이렇게 외쳤다. 턱걸이는 말 그대로 '턱을 거는 운동'이 아니었다. 이는 명칭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턱을 봉에 걸듯 당기면 등이 굽어지며 어깨를 다치기 십상이에요. 등 근육을 써서 턱 말고 가슴이 봉에 닿도록 해봐요."
이론은 쉬운 법이다. 하지만 실전은 어려웠다. 군인일 때는 팔 굽혀 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쉬지 않고 100개씩 거뜬히 해냈다. 하지만 등 근육을 쓰는 턱걸이는 단 한 개가어려웠다. 한 선임은 "정자세로 턱걸이 한 개만 해도 대한민국 상위 10%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턱걸이가 안 되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봤다. 어쩌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한 결과였다. 요즘 세상에 평범한 직장인이 등 근육을 쓸 일이 얼마나 있을까. 고작 노트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손가락 근육만 쓴다. 등 근육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턱걸이를 할 만한 근육 신경은 오래전 퇴화된 듯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등 운동의 기본인 턱걸이를 못하면 헬스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철봉에 매달릴 때면 '딱 하나만 성공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버티거나 고무줄 밴드를 다리에 걸고 반복 연습했다. 무리하게 당기다 근육이 놀라는 바람에 한동안 45도 이상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못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연습해도 잠들어 있던 근육 신경들은 쉽게 깨어날 생각이 없었다. '고작 자기 몸뚱이 하나 한 번 들어 올리지 못하는구나.' 인간의 나약함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석 달 뒤. 평소처럼 봉에 매달려 낑낑대고 있을 때. "와, 미쳤다." 나는 모르게 함성이 나왔다. 등 근육에 힘을 모으고 힘껏 잡아당겼는데 어라, 나의 몸이 도르래처럼 휙 위로 올라갔다 내려온 것이다. 원더골을 넣고 어찌할 바 모르며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축구선수가 딱 내 기분이 아니었을까. 더 신기한 일은 다음날부터였다. 한 개가 되니 다음날 두 개는 쉬웠다. 관성이 붙었는지 한 달도 안 돼 다섯 개까지 쭉쭉 해냈다.
턱걸이 하나에 성공하자 그동안 포기했던 수많은 운동이 떠올랐다. 복싱장에 등록했다가 한 달 내내 원투 스텝만 밟다가 지겨워 그만둔 일, 일 년 뒤 다시 등록해 처음부터 똑같은 스텝만 밟다가 또다시 한 달 만에 포기한 일. 수영장에서 꼬맹이들과 발장구만 치다 쪽팔린다며 이틀 만에 환불한 일. 포기하고 나면 같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역시 나랑 맞은 운동들이 아니었어."
고작 턱걸이 하나일 수 있겠지만, 나의 삶은 분명 달라졌다. 눈앞에 결과물이 보이지 않으면 무서움에 질려 제자리로 돌아오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을 즐기려 한다. 나를 믿고 묵묵히 당기고, 매달리고, 떨어지려 한다.매달림과 떨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끈기와 용기는 자라난다고 믿는다.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믿는다.
물론 앞으로도 일상에서 등 근육을 쓸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쓸모로 따진다면 턱걸이는 존재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쓸모없는 턱걸이를 계속해나갈 것이다. 노자 선생의 가르침처럼 쓸모없는 것들도 쓸모가 있는 법이니까. 턱걸이의 무용함에는 유용함이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