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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청하게, 너만의 언어로

묵묵히 익어갈 말을 위해

by 시루

솔향기 가득한 겨울 숲. 길가의 나무들은 무채색 빈 가지만 남아 찬바람을 휘감고 있는데, 숲길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의 기세가 느껴졌다. ‘무풍한송로’라는 이름 그대로, 겨울 아침의 날카로운 바람마저 가라앉아 더욱 고요했다. (*무풍한송로 舞風寒松路 : 통도사의 소나무 숲길)

가끔 식구들과 함께 이 길을 찾는다. 솔숲 옆으로 계곡이 흐르는데, 통도사 입구까지 발걸음을 따라오는 물소리를 아이들도 좋아한다. 그래서 자꾸만 이곳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일까. 제법 상쾌한 겨울바람을 거슬러 걷다 보니, 계곡 물소리 위로 깨끗한 하늘이 열렸다. 아빠와 앞서가던 첫째가 달려와 사진을 내민다.


“엄마, 하늘이 진짜 짱! 파랗지!”

정말 파랗다. 어찌 보면 ‘쨍하다’라는 말은 여름보다 겨울에 더 어울린다. 찬바람이 온통 쓸고 간 덕분에 탁함이 걷힌 맑은 공기. 뜨거운 열기로 쨍한 여름에 비할 수 없이 아주 엷게 잘 벼려진 쨍함이다. 바람에 코끝이 시린 날일수록 하늘은 이렇게 파랗구나. 이 기분을 아이에게도 건네고 싶었다.


“이런 하늘을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 가르쳐 줄까?”

흥이 가득한 걸음으로 팔짱을 끼며 내 옆자리를 차지한 아이에게 ‘청명하다’, ‘청청하다’는 말에 대한 나의 애정을 들려주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저 하늘은 고스란히 청명(淸明), 맑고 밝다. 푸르다는 뜻을 두 번이나 겹쳐 쓴 청청(靑靑)함은, 이 얼마나 순도 높은 푸르름인지 언어로 표현 가능한 최대치를 끌어왔노라고. 마치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랑을 한껏 살랑거리고 싶은 마음처럼.


“이런 하늘을, ‘짱’ ‘겁나게’ ‘쩌는’ 파랑이라 말해버리기엔 아깝잖아.”

아이는 내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알아들은 듯,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재촉했다.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가 쌓은 말들이 이 솔숲만큼이나 울창하게 펼쳐져 있으니 언어의 감각도 함께 나눌 수 있구나.


말 한마디쯤 별거 아니라고? 살아 보니, 적어도 내게는 별거였다. 색깔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똑같은 것 없이 다양하듯이, 말도 그러했다. 한창 사춘기 때는 남들과 똑같은 ‘파랑’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싫어, 괜한 ‘코발트블루’ 운운하는 것으로 나만의 독특함을 내보이려 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시절 까다로운 고집이 돌아왔는지 더욱 나만의 언어를 욕심내던 때도 있었다. 고리타분하지도 밍숭맹숭하지도 않은 나만의 ‘말’이 샘솟는 샘을 갖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 안의 말을 키우고 싶어 더 다양한 책들을 읽고, 낯선 단어들의 뜻과 활용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습관처럼 이어갔다. 언어가 풍성해지면서 내가 건네는 말이 단단해지고, 쓰는 문장의 폭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다른 것이 더 먼저 변했다. 감각이었다. 주변을 바라보는 눈, 누군가 말에서 느끼는 감정이 훨씬 더 풍성하고 예리해졌다.

인간의 사유 또한 언어에 기대는 법. 내가 모은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 생각의 층을 조금씩 빚어 올리고 있었다. 뭉툭한 사유의 방식이 페이스트리처럼 얇고 섬세한 결로 다듬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 변화가 무척 반갑고 새로워서, 더 깊고 오래 생각하고 싶어진다. 내게 깃든 말들로 노를 저어 아직 닿지 못한 상상의 이야기 나라에 언젠가 이르기를. 작은 희망도 품어본다.


아이에게 이 말들을 다 해줄 필요는 없겠다. 은은한 밤하늘의 어둠에서 반짝- 깨닫는 순간을 만나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언어를 끌어안을 테니. 겨울 숲에서 여름보다 쨍한 푸름을 말하던 이 순간이 언젠가 새로운 언어로 자라나리라 믿는다.

야금야금 꺼내 쓰고 싶을 그날을 위해, 더 많이 보고 듣고 담아두자. 애써 꾸미거나 특별한 단어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오래된 초록처럼 보이지만, 찬바람에 홀로 푸른 소나무처럼. 내게 자연스레 깃든 언어가 묵묵히 익어갈 것이다. 언제든 내 새로운 말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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