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로 통하는 문
노을이 드는 시간을 좋아한다. 해가 낮아지면서 주변의 빛을 모조리 산란시키는 시간. 계절마다 다른 색과 농도로 잠깐 강렬했다가 어둠으로 스며드는 짧은 변화는, 언제나 심장을 뛰게 한다.
그런 시간을 만끽하기 좋은 계절, 여름이 왔다. 오후의 채도를 서서히 낮추며 푸르스름해지다가 어느 순간 청량한 향기를 뿜는 하늘. 환타 느낌 낭랑한 주황빛 노을이 자꾸만 우리를 불러낸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정리는 미뤄둔 채 산책을 나섰다.
한낮의 열기로 부풀던 구름은 슬며시 흩어지고, 하늘에 신비한 언어가 펼쳐져 있다. 귀가 아닌 눈으로 읽어야 할, 색채 언어. 인간의 감각과 논리를 초월한 노을의 색이 언어가 아닐 리 없다. 누구의 마음을 흔들고 싶은 걸까. 석양을 바라보며 멈춰선 사람들. 분명 나만 이렇게 마음이 일렁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 노을은 끝내 누구도 부르지 않고 지나갈 테지. 애초에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 찰나의 장면에 동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래 지켜보아야 드러나는 변화가 이 시간만큼은 압축되어 빠르게 펼쳐진다. 붉어지다 어둑해지는 찰나,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는 어떤 통로가 열렸다 닫혔을지도 모른다. 잠시 열린 문으로 새 에너지가 흘러와 무력했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누구나 이런 통로 하나쯤 알고 있을까, 문득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여름은 나에게 첫 번째 통로를 알려주었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밖으로 내달리던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릴없이 팔다리를 쭉 뻗고 마루에 누웠던 어느 오후였다.
마당을 향한 큰 창에 달린 커튼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내려올 때마다 내 얼굴을 스쳤다. 까무룩 눈이 감겼다가 스르륵 깨어나던 순간, 처음 그 통로를 보았다.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커튼 뒤로 천장의 네모들이 구부러졌다. 익숙한 무늬가 서서히 뒤틀리면서,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드는 듯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함께 낯선 공기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은 등과, 구부러진 천장 사이를 흐르던 열기가 오래도록 내 안을 맴돌았다.
그 후로 나는 종종 마룻바닥에 누워, 통로의 문이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커튼이 잦아드는 너머로 반짝, 다른 세계를 향한 문. 어떤 날은 깊은 바닷속으로, 또 어떤 날은 함석지붕 위를 달리는 말을 타듯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어딘가로 불쑥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지나 어른이 되었고, 낯선 세계의 감각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어느 날, 노을 속에서 그 찰나의 통로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여전히 내게 암호 같은 말을 걸어오는 빛에 빠져들다가, 열린 틈으로 훌쩍 마음이 건너갔다. 오래전 커튼의 너울거림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 흩어지는 색채의 언어에 닿을 듯 멀어졌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이 여름의 통로가 내 마음의 겹을 키웠다. 새로운 문을 발견할 때마다 나를 가로막던 좁은 시야가 뚫리고, 어둠이 걷히는 듯했다. 그 문은 잠시나마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통로였다. 상상과 현실 사이에 선 그 찰나들이 내 두근거림을 작게라도 살아있게 했다. 경계를 허물어준 통로 덕분에, 고집을 내려놓고 새롭게 마음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니 세상과 씨름하다 맥 빠진 이 여름의 응급 처방은, 타오르는 노을 앞에 서서 순간을 목격하는 일. 어둠이 짙어지기 전, 푸르스름한 하늘에 반짝 스쳐갈 문을 찾아 나서보자. 통로가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앞에서 내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