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과 벌써 사이에서 자란다
겨울의 끝자락, 2월은 언제나 아직과 벌써 사이를 오간다. 겨울이 끝나길 기다리는 마음과, 이른 봄을 향해 쫑긋 세운 감각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정신없이 '아직'과 '벌써'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2월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폭 낮아진 햇빛을 가늠하다 걸으러 나섰는데, 아직은 파고드는 바람이 꽤 차다. 옷깃을 다시 세워 올리고도 얼굴을 스치는 찬 기운을 막을 재간이 없어 당황스럽지만,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집 앞 매화나무들도 이미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고, 오솔길 안쪽 숲에도 겨우내 매끈했던 빈 가지마다 작은 그림자들이 매달려 있다. 바닥을 데우다가도 금세 식어버리는 2월의 온기지만, 옅은 빛이 작은 겨울눈을 감싸며 그림자를 키워주고 있었다. ‘이제 늑장 부리지 말고, 매일 걸으러 나오라’는 봄의 플러팅인 듯, 작게 웅크린 기운을 담뿍 받아본다.
붉은 동백 앞에 잠시 멈췄다가 돌아서니, 이번엔 목련이다. 모퉁이 커다란 나무에 두툼한 겨울눈이 포엽을 벗어던지고 있었다. 다른 나무의 작은 그림자 같은 겨울눈에 비해, 목련의 겨울눈은 덩치와 기세가 단연 압도적이다. 수북한 솜털을 두른 자태로 꿋꿋이 겨울바람을 맞다가, 겉껍질이 말라 딱딱해지면 가장 바깥의 털옷이 떨어진다. 나무 아래 마른 포엽이 쌓일수록 봄에 가까워진다. 무엇을 감싼 것일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소중한 것을 품은 듯 당당히 솟아있으니, 그 안에 품은 것이 목련임을 알면서도 자꾸 상상하게 된다.
‘품다’ ‘감싸다’라는 말에 유독 마음이 동한다. 특히 그 의미를 시간과 연결해 자주 떠올리는데, 아마도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지워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딸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 사이에 흘렀던 시간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어서, 단순히 흘러가는 선형의 시간과는 그 향과 질감이 전혀 다르다. 함께 밥을 먹다 엉뚱한 말 한마디에 밥풀을 날리며 웃던 그 순간처럼, 서로에게 끈끈하게 엮인 이 시간을 빠짐없이 담아두고 싶어진다. 고명재 시인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속 일화처럼, 목련의 겨울눈을 보고 있으면 ‘시간을 말아서 봉封 해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시간을 돌돌 말아서 봉하다니.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놓은 말이 아닌가. ‘이 단단한 털옷은 무엇도 건드릴 수 없음’ 꼬리표를 달아 둘까. 겨울눈은 결국 겹겹이 입었던 포엽을 벗고 진주처럼 하얀 목련을 내보이겠지만, 나는 영영 담아두고 싶다. 아이들은 저만의 시간을 더 빛내며 살아가라고 훨훨 보내주고, 가끔 혼자(아니, 남편과 함께) 열어볼 겨울눈 하나. 시간을 이기지 못해 겨울눈은 떨어지고, 꽃마저 져버리겠지만 뭐 어떤가. 마음으로 봉해둔 하나쯤은 중력을 거슬러도 좋지.
겨울 방학을 마무리한다며 친구들과 광안리 바닷가로 놀러 간 첫째가 사진을 보내왔다. 세상에, 겨울 바다와 노을이라니. 집 앞 놀이터에서 아장아장 놀던 꼬마들이 학교 앞 분식집에서 깔깔대는 어린이로 자랐고, 이제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낯선 거리를 누비는 청소년이 되었지. 점점 자신의 동그라미를 넓혀가는 녀석들이 어찌나 귀하고 기특한지. 자꾸만 더 먼 곳을 궁금해하는 너를, 네가 돌아올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마음. 날아든 사진 한 장에 많은 장면이 스쳐, 결국 싱긋 웃고 말았다. 잘 크고 있구나. 아직 어리기만 한 것 같은데, 벌써 저만치 나아가 있다.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아이의 시간이 사랑스럽다.
아이들은 아직 모르겠지, 지금이 얼마나 어여쁜 시간인지. 너희는 아직 모른 채로 충분하다며, 나는 이 시간을 돌돌 말아 털옷을 입힌다. 소중히 봉해 놓을게. 겨울도, 봄도,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