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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꽃향이 다시 불어올 계절에

결국 기억 속을 걷게 될지라도

by 시루

초여름 제주에는 달콤한 바람이 분다. 귤 하우스에 다녀오셨다는 아빠와, 작년의 귤꽃 향기를 떠올리며 한참 통화하던 중이었다.


“아빠, 감기 걸리셨어요?”

한참 지나고서야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알아챘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 아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목이 잠기는 듯했다. 자꾸만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 감기인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이것도 증상이더라.”

잠시 뜸 들였던 침묵을 가르는 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숱하게 한숨을 삼켰을 무거운 목소리가 파고들어, 명치가 아려왔다. ‘그럴 수도 있구나… 아직 많이 불편하신 건 아니죠?’ 애써 아무렇지 않게 묻고는, 다음 주말쯤 집에 내려가겠다는 소식을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빠가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지 3년째.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가 굽혀지지 않는 정도였다. 유명 대학병원을 오가며 진료와 검사를 반복하는 동안, 금세 오른팔 전체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빠졌다. 그나마 다행으로, 1년 가까이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아빠처럼 진행이 더딘 경우는 드물다는 의사의 말에 그저 감사하며, 현재 유일한 치료인 ‘진행 속도를 늦추는’ 주사를 맞고 있다.

그런데 올봄부터 조금씩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최근엔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일도 부쩍 힘들다 하셨지. 그렇다고 벌써 목소리라니. 목 근육을 타고 목 안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은, 서서히 말과 식사, 더 심해지면 호흡기 근육까지 마비가 올 가능성을 뜻한다. ‘이건 너무하잖아!’ 어딘가에 외치고 싶지만, 나도 목이 메일뿐이다.


작년 초여름, 귤꽃향이 가득한 길을 걸었던 산책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남편과 아이들 없이 홀로 친정에 간 것도 오랜만이었고, 귤밭마다 가득한 하얀 귤꽃을 본 것도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인 듯했던 날.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치고 앉아 있다가, 창으로 불어오는 향기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빠! 나가자!”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자는 내 성화에, 아빠도 마지못해 ‘그럼 귤 하우스까지만 다녀오자’며 나섰다. 오른쪽 옷소매가 헐렁하게 비어 있어 나를 왼편에 세우셨다. 그래도 함께 나와주신 게 어디냐며,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며 마을 길을 걸었다. 상큼하고 달큼한 귤꽃 향이 돌담마다 스며 있어, 골목 어귀를 지날수록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한참 떨어진 평상에 모여 계신 어르신들이 고개를 길게 세워 나를 살피셨고, 아빠는 육지에서 둘째가 내려왔다며 멋쩍은 웃음으로 인사했다. ‘저 낯선 처자는 누구인고’ 살피던 어르신들의 부러움이 묻은 눈빛에 넙죽 인사를 드리자, 반가운 손짓이 날아왔다. 어쩐지 으쓱해진 아빠의 너털웃음이 따스해 발끝이 가벼워졌다.

귤밭에 도착해 아빠가 하우스 안쪽을 둘러보시는 동안, 나는 막 물들기 시작한 노을빛을 배경으로 귤꽃들을 사진에 담았다. 밭 한가운데 있는 산담(제주도 밭 안에 있는 무덤을 감싼 돌담) 아래 보라색 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어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 아빠는 ‘무꽃’이라고 일러주셨다. 담 위에 잠깐 올라가도 괜찮다며, 이쪽에서 더 예쁘게 찍어보라 하시는 아빠. 이러니 자꾸만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지지.

벌써 어둑해진 길 위로 풀벌레 소리가 굴러다닌다. 기막힌 노을이 먹구름 뒤에서 한창일 시간. 여긴 어디쯤일까. 어릴 적 동네는 몇 번에 걸쳐 큰 도로가 생기면서 조각나 버렸고, 밭에서 내려오는 길은 어스름한 그림자를 입고 더 낯설어졌다.


“여긴 어디지?”

“여기는요?”

방향감을 잃은 내가 계속 물음표를 던지면 아빠는 술술 옛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렇게 아랫동네까지 걸어 내려오니 드디어 아는 길이 나타났다. 어둠이 순식간에 걷히고, 또렷한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빠! 여기, 비료 포대 타던 곳!”

눈 쌓인 겨울, 비탈이 꽁꽁 얼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던 어귀가 보였다. 참말 신기하지. 비료 포대를 탔어도 몇 번뿐이었을 텐데, 그 겨울날의 장면이 완벽하게 살아나 시끌벅적 나를 감쌌다. 볼이 꽁꽁 언 채 웃느라 입술이 뻐근하던 느낌까지 생생했다. 신기하다며 조잘거리는 나를 향해 아빠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원래, 기억은 그런 거야.”

말을 멈추고 아빠를 향해 돌아섰다. 굽은 길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옆모습. 아빠도 문득, 당신이 가장 빛났던 젊은 시절의 장면을 바라보고 계셨을까. 맞다. 기억이란 그런 거지. 내가 붙드는 게 아니라, 순간이 내게 새겨지는 것. 짧고 선명한 조각이 박혀 변하지 않는 것.

비탈 아래를 걷는 우리 곁으로, 귤꽃 향기 섞인 저녁 바람이 휘요요 스쳤다. 다 큰 딸이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게 좋으셨을 아빠와, 그런 내가 좋았던 나. 언젠가 다시 이런 저녁을 맞고 싶었는데, 현실은 자꾸만 끝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나아간다는 건, ‘나아진다’는 뜻인 줄 알았다. 괴로움 앞에서는 ‘이 또한 지나가리’를 읊조리며 흐르는 시간에 기대었고, 지금만 견디면 언젠가 나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삶은, 내 어깨를 움켜쥐고 몰라도 될 것을 결국 알게 한다. 회복이 아니라 끝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예상했더라도, 더 깊이 아픈 일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은 흐르는데, 아빠의 시간은 앞머리부터 흩어진다. 우리는 과거가 희미해지지만, 아빠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부터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아빠는, 삶은, 끝을 향하면서도 여전히 내게 사랑을 가르친다. 귤꽃향을 타고 이 계절마다 다시 돌아올 바람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늘 곁에 있는 마음으로.


막막해진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떤 말을 준비해야 할지, 어떤 마음을 삼켜야 할지. 곧 괜찮아질 거라 위로할 수 없는 나의 최선은, 결국 곁에 있는 것뿐일지 모른다. 마을 어귀를 함께 걷던 그날의 걸음을 되살릴 수 없다면, 그날의 기억 속이라도 걸어봐야지. 결국엔, 내 마음속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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