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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터져 나오는 사랑처럼

초여름 토마토 같은 사람이 되어볼까

by 시루

오랜만에 토마토를 샀다. 여름이 막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시험 준비로 애쓰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서, 좋아하는 간식 준비에 공을 들인다. 달콤한 여름 과일들보다 먼저 도착한 토마토를 가장 반기는 건 역시 첫째였다. 학교를 마치면 다짜고짜 냉장고 속 토마토의 안부를 묻는 녀석이라, 가장 알맞게 익은 두세 알을 꺼내어 씻어두었다.


맨들맨들 단단한 빨강이 주방 트레이 위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요즘엔 과일마다 당도를 높이려 개량되어, 아무리 잘 골라도 예전의 달면서도 감칠맛 도는 풍부한 맛을 찾기 힘들다. 지난 주말 청과물 시장에서 우연히 맛보았다가 남편과 동시에 “오오!” 감탄했던 귀한 토마토다. 아주 달지는 않지만, 입안 가득 기분 좋게 퍼지는 본연의 맛. 과일이나 사람이나, 치장 없이 자기만의 멋으로 출중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모양이다.

비에 흠뻑 젖은 듯 물기를 머금은, 빨간 토마토. 아이가 돌아와 씻는 동안 오목한 접시에 한입 크기로 뚝뚝 잘라 담는다. 시험 직전에 수행까지 몰려서 졸리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는 요즘. 힘들겠지만 스스로 잘 견뎌내기를 응원하는 내 마음도 슬쩍 집어넣었다.

아차, 잠깐 힘을 주었더니 매끈한 껍질이 터지며 속 알갱이들까지 흘러나왔다. 앞에서 재촉하며 잡아끄는 부모가 되지 않으리라 자신했지만, 아이가 클수록 기어이 삐죽거리는 내 욕심을 들킨 기분이다. 얼른 고개를 저어 마음을 지운다. 대신 설탕 한 꼬집 넉넉하게 집어 들어, 살살살- 반짝이게 덮어주었다.


코앞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앉아 헤실헤실 반달눈이 된 아이. 초여름의 더위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토마토가 부러워졌다. 접시째 들고 마지막 단맛을 사수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양 볼 가득 방울토마토를 넣고 웃던 표정을 보는 듯하다.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찡긋 웃던 눈, 엄마의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내 얼굴에 바짝 다가와 야물야물 씹으며 종알대던 꼬마였다. 그 작은 눈에 엄마만 가득 채우려던 아이는, 이제 저만큼 멀찍이 앉아 혼자 고심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나는, 초여름 토마토 같은 사람이 되어 볼까. 부드럽지만 단단한 껍질로 나를 지키고, 누군가에게는 스르륵 마음이 흘러나오는 사람. 여린 속을 단단히 품을 힘 있는 사람. 내가 속이 꽉 찬 토마토라면, 가끔 아이의 뾰족한 말이 껍질을 뚫고 들어와도 더 큰 품을 내밀 수 있을 텐데.

말로는 쉽지만, 막상 매일의 일 앞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입은 껍질은 아직 얇고 쉽게 흔들린다. 그 위로도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쓸어주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부모의 자리에서 천천히 익어가려면, 나부터 단단해져야 하니까.


잠시 잊었다가도 여름 문턱에서 불쑥 떠올라 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 아이의 웃음 한 줄만으로 내게 큰 힘이 되는 것처럼, 톡 터져 나오는 토마토 속처럼 감추기 힘든 사랑까지 불려 나올 테지. 매끈한 빨강을 건네던 오늘처럼 마주하면 좋겠다.

네가 너의 계절을 살아내는 동안에, 내내 무르지 않고 붉게 빛나기를. 나 역시 단단히 이 자리에 있어, 다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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