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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기울 때 채워지는 것

기울고, 흐르고, 스며든다

by 시루

휘리릭, 페이지를 놓친 속도로 가을이 온다. 천천히 넘겨 읽던 봄, 끈적하게 달라붙어 떼어내기 힘들었던 여름. 손에 쥔 책을 계절이라 바꿔 부르면, 가을은 조심히 넘기다 순간 놓쳐버린 페이지 같다.


추분(秋分).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완벽한 균형의 날이 지났다. ‘이제 가을이다!’ 외치고 싶었지만 절기도 자꾸만 자기주장이 약해진다. 춘분은 몰라도 추분 매직만큼은 정확히 온다더니, 수취인불명처럼 자꾸만 되돌아오는 여름 탓에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느끼지도 못하고 놓친 줄 알았다.

툴툴거리는 심보를 들었나, 오후 바람 한 줄기가 목뒤를 쓸고 지나갔다. 추분 매직이 멀리 찬 기운까지 뭉텅 끌어다 놓은 듯 갑자기 서늘해져 당황스럽지만, 밀린 페이지가 질주하듯 내달리는 바람을 즐겨줘야지.

바람에 떠밀리듯 발길을 돌리자, 골목 끝 가지런한 나무들 사이로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뜨거움에 높이 치솟던 구름은 밀려나고, 길게 흩어지기 시작한 구름이 예고하던 장면이었다. 반가움에 멈춰서서 가을이 데려온 오후 빛을 담았다.

밤이 더 길어지기 시작하면, 빛이 한쪽으로 기운다. 아직 이른 오후인데도 나무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사이로 흘러든 빛이 더 길게 누웠다. 불균형이 만들어준 기울기가 이런 깊은 색을 내는 것일까, 잠시 나도 그 채도 안에 함께 서 있었다. 단숨에 충전되는 배터리가 된 기분으로.


나는 무엇을 채워 넣고 싶었던 걸까. 여름 내내 도서관에서 반나절을 보내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루틴을 지켜내다 보니, 자꾸만 미뤄지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픈 부모님에게 더 살뜰한 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남편과의 시간도 더 챙겨야 하는데. 한창 학업과 사춘기의 복잡한 심리를 핑퐁처럼 오가며 분주한 딸들에게 조금 더 곁을 내어줄 시기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내 일에 열정이 커질수록, 부족함도 함께 드러나는 불균형에 소란해지고는 했다. 이 덜그럭대던 틈을 가을빛이 잠시 채워주고 지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기울어졌을 때 부드럽게 흐르고, 더 깊이 닿을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의 균형은 이런 불균형에서 오는 것 같다. 가만히 흐르며 스며든 묵직하고 온화한 감각, 무언가를 열렬히 태우고 난 뒤에만 풍기는 고소한 가을 냄새처럼. 나 또한 그렇지 않냐며 나를 토닥인다. 완벽하지 않은 날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고.

그래, 좀 더 깊숙하게 이 가을을 들이마시자. 단단하게 응축된 에너지를 안고 뚜벅뚜벅 걸어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자. 계절의 틈, 계절의 오버랩. 이 변화의 순간이 또 한 번 둥글둥글 내 등을 쓸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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