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맥락 완성형의 사랑
한동안 꽃 구독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다. 계절에 맞춘 꽃들을 택배로 보내주는 온라인 마켓들이 늘고, 마을에도 예약한 주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꽃 트럭’이 유행처럼 생기던 때였다. 일부러 꽃집에 들르지 않아도, 훨씬 저렴한 가격에 선물처럼 도착하는 꽃다발이라니. 나 역시 솔깃했다.
신청한 꽃은 기대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어 생화 박스를 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한창 제철이던 색색의 튤립과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함께였는데, 오랜만에 화병을 꺼내고 아이들과 꽃을 나누어 꽂으며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했다. 집에서 키우는 화분들이 주는 기쁨과 다른 기분이었다. 매일 잎을 살피고, 물을 주고, 작은 변화에도 마음을 쓰는 과정이 모두 생략된, 그야말로 맥락 없이 도착한 ‘완성형 기쁨’이었다.
그래, 가끔은 이런 기쁨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지. 내 수고가 들어있지 않은 순도 100%의 선물.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구독 서비스를 끊었다. 어쩌면 내 취향과 손길이 닿지 않은 존재에게 애정이 빠르게 식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또 다른 택배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네 귀퉁이를 단단하게 감은 커다란 상자. 택배 송장을 살피지 않아도, 좌우로 가로지른 겹겹의 노란 테이프로 알 수 있었다. 시댁에서 보내셨구나. 묵직한 상자를 겨우 끌고 들어와 열어보니, 신문지에 둘둘 말린 무, 쪽파, 양배추, 당근이 끝없이 나온다. 손을 털고 바로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런데, 잘 받았다는 인사에 어머니께서 오히려 깜짝 놀라시는 게 아닌가.
“아이고, 텃밭에 쪽파 뿌리들이 버려져 있고 깨진 무들이 나와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너희 집으로 보내느라 그랬구나. 말도 없이!”
아버님이 손수 챙기셨다니. 내 입에서도 ‘아이고,’ 감탄사인지 한숨인지 모를 말이 새어 나왔다. 깍두기라도 담가 먹을까 싶어 무청을 남기고, 양배추는 두꺼운 겉잎을 떼어내고, 깨끗한 쪽파를 정갈하게 모아둔 신문지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눅눅해진 종이 사이에 흙 냄새가 배어 있었다. 무섭고 무뚝뚝해 보이시지만, 당근밭을 처음 봤다며 놀라워하던 며느리를 위해 냅다 당근 한 박스를 보내셨던 분. 작아진 뒷모습으로 웅크려 앉아, 가느다란 쪽파를 다듬고 계셨을 투박한 손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귤 수확 철마다 깨끗한 귤과 한라봉을 받는 게 전부였다. 이제는 나도 살림이 늘고 아이들도 자라니, 직접 다듬어 요리할 수 있는 재료들이 흙내음을 안고 찾아오는 것이다. 시댁 텃밭의 계절이 고스란히 담긴 상자나, 친정 장독대의 고추장과 옹기에서 익은 매실청이 들어있는 상자들이.
나는 이미 ‘텃밭 구독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주문한 적도 없고 구독 해지 버튼도 없지만, 계절마다 한결같이 도착하는 서비스. 생각해 보니 이것이야말로 무맥락 완성형의 사랑이었다.
내 수고를 대신해 땀 흘리고 흙 묻은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음이, 구겨진 신문지에 둘둘 말려 내게로 온다. 어느 날은 사과 상자가 해산물을 품고, 또 어떤 날은 상자 가득한 귤 사이에 고소한 참기름이 숨어있다. 이 정성을 사양하는 건 불가능해서 “제발 적당히만 담으세요.”라고 합의 아닌 합의를 해도, 단단히 감은 테이프에 밀봉된 ‘적당히’는 언제나 터질듯한 무게로 도착한다.
덕분에 나는 완성된 사랑을 조금씩 덜어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되는 날이 많았다. 냉장고를 열면, 채워진 사랑이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선물처럼 도착하는 이 구독 서비스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순 없겠지만, 아직은 식탁 위에 펼쳐 두고 힘을 얻는다. 맛있게 익은 쪽파김치와 함께, 적당히가 없는 적당한 사랑을 내 아이의 밥숟가락 위에 올린다. 여기까지가 구독자의 의무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