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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아 기억이 열리면

봄보다 먼저 나를 깨우는, 사랑

by 시루

눈이 녹으면 기억이 열린다. 하얗게 덮였던 층층의 시간이 녹아내린 듯, 말갛게 시작된 아침.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눈구름이 걷힌 하늘은 이미 푸르다. 설 연휴 시작과 함께 눈이 내렸고, 친정으로 건너온 간밤에 딱 맞춤한 타이밍이었다.

아이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함께 뒷마당으로 나섰다. 그늘진 나무 밑동과 돌담 아래에서 하얀 얼음보숭이가 해를 받아 반짝인다. 차갑고 맑은 공기를 가득 머금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울퉁불퉁 드러난 돌멩이를 조심스레 밟으며 돌담 아래까지 천천히 걸어 보았다.

귤나무, 까만 돌담, 초록 풀, 그 위에 앉은 눈. 이렇게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걸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서걱거리는 눈 얼음덩이를 두 손에 쥐고 단단히 뭉치느라 바쁘다. 나도 몇 년 만인지 모를 아침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저녁 어스름에 은은하게 빛나던 눈밭은, 밤새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하며 얼음보숭이로 변해있었다. 수만 개의 결정들이 서로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했다. 차가운 결정에 따스함이 버무려진 겨울 아침의 빛이었다. 고슬고슬 얼어있는 얼음보숭이를 손에 쥐고 쓰다듬으면, 그리움으로 녹아 윤이 날 것만 같았다.

거짓을 숨길 수 없는 눈. 하얗게 덮어두어도 녹아내려 드러나고, 어느 누가 그 위를 걷더라도 자국을 감출 수 없는 게 눈이니까. 볕 들지 않는 돌담 아래 감춰 두고는 잊은 채 지나버린 마음이 있다. 무엇을 잊고 있었나. 녹는 눈 아래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기억을 따라가게 된다.


이 시골에서 천방지축으로 자란 나는 “자연에서 큰 사람은 꼭 티가 난다니까요.”라는 말을 듣곤 하는 어른이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걸 아쉬워하는 사람도 가끔 만나지만, 나는 유치원이 뭔지도 몰랐고 가진 것이 적었어도 속상하거나 부럽진 않았다. 그런 욕구가 생길 틈이 없었다. 처음 가본 친구의 이층집에서 진짜 피아노를 봤을 때도 부럽기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하루 종일 뜀박질하느라 바빴고, 함께 풀숲을 누비는 친구들이 있어서 마냥 즐거웠다.

그런 내게도 딱 하나, 부러운 게 생겼다. 어느 책이었는지 텔레비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온 가족이 트리 아래 선물 상자를 놓아두는 장면이었다.


‘와… 저 선물을 각자 준비한다고? 포장지도 전부 다르네. 하나씩 직접 포장한 걸까?’ (물건을 사면 포장해 주는 세상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우리 집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아빠가 큰 동백나무 화분을 구해 트리처럼 다듬어 주셨다. 그 아래 선물 상자를 놓아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으로 입술만 꼬집을 뿐이었다. 제주에서는 그 무렵이 귤 수확 철이라 가장 바쁜 시기였다. 우리 네 남매의 선물을 따로 챙겨 주실 여유 또한 없었다. 어린 눈치로 말을 삼켰지만, 마음에 들어온 판타지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좌절 섞인 부러움에 어쩔 줄 몰랐던 나는, 트리 장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며 다른 것으로 눈을 돌렸다. 작은 문방구에서 빨강 초록 화려한 반짝이 줄을 골랐다. 밤마다 언니 동생들과 동백나무 가지를 장식하느라 손이 반짝거릴 만큼 요란을 떨다 잠들곤 했다.

그런데 부부 동반 모임에 다녀오신 아빠가, 잠든 우리 머리맡에 인형을 하나씩 놓아두신 거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이었다. 선물 상자도 포장지도 없었지만 눈 뜨자마자 덥석 끌어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 받아본 크리스마스 선물, 하얗고 털이 보드라운 너구리 인형이었다. 부러움이 단숨에 녹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너무 행복하면 울고 싶어진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스웨터에 하얀 털을 잔뜩 묻혀가며 그 인형을 끌어안고 다녔다. 그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 가득 남아 있는 듯하다.


이제는 내가 선물을 고심할 차례다. 엄마가 되었지만,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아이들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배운 사랑처럼, 무리한 꿈이 아니라면 한 번쯤 이루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에게 선물하겠다고 나선 딸들과 함께 쿠키를 구웠다. 몰래 접시를 치우고 쪽지에 답장을 써 주며 웃던 크리스마스 새벽. 사랑은 이렇게 또 한 번 깃드는구나, 하며 어린 날의 나를 떠올리고는 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직접 진저맨 쿠키를 굽고, 선물도 미리 고른다. 트리 또한 해마다 작아져, 좋아하는 그림책과 나란히 조명을 켜 두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루틴처럼 지브리 영화를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눈이 녹은 자리에서 내가 옛 기억을 발견했듯, 아이들과의 시간도 겨울 눈 아래 차곡차곡 쌓여간다.


눈은 또 내리고, 녹은 자리마다 함께한 기억이 피어나겠지. 그 기억으로 사랑을 다시 경험하는 일. 봄보다 먼저 마음을 깨워주는 사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저마다의 겨울을 따뜻하게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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