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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품고, 다시 봄으로

잠들어 있던 문장을 깨운다

by 시루

지난봄, 우리 집 식물들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전환을 알리던 제라늄은 창을 향해 길게 기울어지며 애쓰던 모습 그대로 3월을 맞았다. 힘을 내어 꽃대 하나를 올렸지만 꽃망울은 끝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매년 제라늄의 바통을 이어받던 개나리자스민 역시 어찌 된 일인지 내내 줄기를 바짝 세운 채 잠잠했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액상 비료를 꺼내다가 문득, 내가 꽃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싶어 그만두었다.

며칠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동안, 햇살을 받으려는 제라늄 줄기만 부쩍 길어진 듯 보였다. 꽃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이 기회에 가지치기해 보자는 결심이 섰다. 몸을 가볍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미루던 삽목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길게 뻗은 중심 줄기에서 곁가지들을 잘라냈다. 투명한 플라스틱 화분에 흙을 채우고, 잎 서너 장을 품은 작은 줄기들을 조심스레 꽂았다. 뿌리가 잘 나오고 있는지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앙증맞은 화분이었다. 무사히 자리 잡길 바라며 흙을 살살 토닥이고 물을 뿌렸다. 오종종하게 서 있는 이 녀석들도 낯선 흙의 감촉에 놀란 걸까. 큰 줄기에 기대던 곁가지가 이제는 어엿한 본체가 된 걸 아는지, 바짝 힘을 주고 있는 듯했다.

신문지를 깔고 작업하는 김에 개나리자스민 화분도 내려놓고 가지를 솎아주었다. 겨울 앓이를 하느라 잎을 떨구고 있어 다듬기 조심스러웠지만, 묵은 줄기가 버거웠을지도 모르니까.

봄이 한층 깊어질 무렵, 삽목한 제라늄 가지들이 제법 뿌리를 내렸다. 더욱 놀라운 건 개나리자스민이었다. 꽃 대신 잎을 피우기라도 하듯 연한 새잎을 내기 시작하더니, 말라버린 줄 알았던 잘린 줄기에서도 연둣빛 잎이 돋아 화분이 온통 화사해졌다.


새로움은 새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오래 묵은 마음에서 돋은 잎을 보듯, 또 다른 형태로 봄이 깃든 화분을 들여다본다. 겨울부터 준비 중인 에세이가 자꾸만 깊은 감정을 건드려서, 솔직함을 꺼내 보일 용기가 점점 수그러들던 차였다. 글쓰기를 멈추고 싶을 만큼 흔들리던 그때, 작은 연둣빛 잎들이 괜찮다며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초록이들. 오늘의 문장이 내일의 새순이 되어, 줄기를 뚫고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응원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흙 속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듯, 내 글의 변화를 함께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글벗들과 함께 쓰고 퇴고하는 동안 내 글도 차츰 자라며 단단해졌다. ‘욕심’을 내려놓고 ‘성실’을 입어보려고 시작한 브런치북 연재 덕분에, 지쳐 있던 마음도 다시 일어섰다.


어쩌다 보니 나는 우리 집 초록이들과 닮은 계절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봄을 기다리기보다, 내 안에 이미 와 있던 봄을 다시 들여다본다. 커다란 화분 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봄일지도 모른다. 블로그와 일기장에 써 둔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며, 그 시간을 천천히 깨우는 중이다.

담아 두었던 이야기의 묵은 흙을 풀풀 털고, 지금의 내 하루를 입혀 다시 심는다. 어떤 것은 해바라기 씨앗인 줄 알았더니 도토리였고, 이미 열매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씨앗을 만나 놀라기도 한다. 이 또한 매일 쓰고 다듬는 시간이 준 발견일 것이다.


내 글을 씨앗 삼은 문장들이 굳은 줄기를 뚫고 새잎을 틔운다. 그 작은 새로움이, 든든한 ‘믿는 구석’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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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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