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인류는 반세기 전 수백 년 동안 지속된 모노가미 체제의 실패를 인정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속화된 지구온난화, 환경호르몬으로 인한 난임, 방사능 오염은 어마 무시한 인구 절벽 현상을 초래했고 한때 80억을 바라봤던 지구 인구는 200년이 더 지났을 무렵 겨우 10억 남짓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찬란한 과학기술의 발전 덕에 당시 인간의 기대 수명은 200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10억 명의 평균 연령이 150세를 넘어간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늙고 싸늘하게 시들어가는 인류의 모습이었다. 난임, 피임기술의 발전, 결혼 기피 현상, 생활 터전의 감소, 결혼 기간의 장기화 그리고 젠더 다양성(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총 1,000여 가지의 젠더가 존재한다.) 등이 인구 절벽의 주요 현상으로 지목되었고, 23세기를 맞이할 무렵 저명한 학자들로 구성된 인구대책위원회에서는 23세기 초 폴리아모리 체제로의 전환이 인구 감소에 대한 해결책임을 내놓았다. 우선 선진국을 중심으로 빠른 체제 전환이 이루어졌고 100년이 지나지 않아 전 세계의 인구수는 상승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회복되던 지구의 환경은 늘어난 인간들 덕에 다시 파괴되기 시작했지만) 다자 연애는 인류를 멸종 위기에서 단숨에 구해낸 듯 보였다. 덕분에 23세기 말의 지구는 그야말로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인류의 난교 축제 말이다. 난교라는 부적절한 표현을 쓴 것은 미리 사과한다. 어릴 적 사회 공동육아시설에 있었을 때부터 난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한국은 폴리아모리와 더불어 국가에서 아이를 책임지는 공동육아제도를 선택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공동육아시설에서 자연스럽게 폴리아모리의 개념을 흡수하고 독점적 사랑이란 것에 대해 죄의식을 부여받지만 매일 바뀌는 양육부모 속에서 나는 유독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받길 원했다. 나는 마치 탁란을 통해 부화한 뻐꾸기 새끼처럼 그녀가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는 것을 질투했고 그녀의 독점적인 애정을 갈구하고 집착했다. 물론 그녀가 내 친엄마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도 특별히 나한테 애정을 쏟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성장하는 데 필요로 하는 편향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애정적으로 미성숙한 뻐꾸기 새끼로 자라났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는 나의 기이한 성향은 나의 삶을 더욱더 삐꺽 대도록 만들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처음 사귄 여자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교실 한복판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웃으면서 축하해 달라는 그때 당시 여자 친구의 표정이 이해되질 않는다. 여하튼 떠들기 좋아하는 사춘기 동급생들이 가득한 학교 한복판에서 그 난리를 친 덕에 나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져나갔다. 담임선생님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정신상담을 추천했고 학교 측에서는 내가 혹시나 따돌림이나 괴롭힘 대상이 될까 우려하여 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3년 동안 ‘순정남’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으로 불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무렵, 나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폴리아모리의 삶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단지 모방일 뿐이었기에 만나던 여자 친구가 다른 애인을 만나러 갈 때면 겉으론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여도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갔지만 말이다. 사회는 이런 집착과 질투를 용인하지 않았기에 그럴 때면 나는 유일하게 나의 성향을 다 이해하는 대학 친구 A를 불러내곤 했다. 흠잡을 데 없는 폴리아모리인 A는 무려 8명과 몰섬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노가미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리버럴이기도 했다. A는 내가 만나는 애인에 대한 질투 섞인 하소연을 쏟아 내면 늘 말없이 술을 따라주며 내가 21세기에 태어났으면 정말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30대에 접어들던 해, 나는 납품하러 간 거래처에서 새로 일하게 된 B를 만나게 되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B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한 달 뒤 B의 전임자가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나고 나자 B와 함께 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나에게 의지하는 B에게 내가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일주일에 한 번, 납품을 위해 만나는 한 시간 동안은 그녀의 모든 대화와 감정을 독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시콜콜한 한 주간의 브리핑을 하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녀를 보며 그녀와 모노가미 관계를 맺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실 한국 폴리아모리 체제에서는 호감이 가는 상대 누구에게든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고 상대도 데이트 신청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미 다수의 연애 관계를 맺고 있는 B에게 질투를 느끼며 힘들어하고 싶지 않았기에 호감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자라나는 감정을 꾹꾹 억눌러가며 몇 달이 지났을 무렵, 평소와 다름없이 납품을 진행하던 중 그녀가 불쑥 자신이 완전한 싱글 상태가 되었다고 얘기했다. 곧이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가 맺고 있던 쿼드 관계가 붕괴되었고 밸런스가 깨진 관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싱글 상태로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보냈다. 그녀는 건강, 종교, 젠더 등 나와 매칭 되지 않을 사항이 없었기에 즉각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그때부터 우리는 연애관계를 맺었다. B는 우선 한동안은 다른 연애 관계를 추가할 마음은 없다고 했고 친구 A도 일시적이겠지만 안정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는 그녀와 연애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서 몇 번 데이트 신청을 받은 적이 있지만 늘 종교 또는 젠더가 맞지 않는 거짓 답변을 통해 새로운 만남을 피해 다녔다. 친구 A의 말처럼 일시적인, 언제 깨질지 모르는 모노가미 관계였지만 목이 빠질 듯 입을 벌려 부리를 들이미는 뻐꾸기 새끼처럼 독점적인 애정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B가 새로운 이성을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개월쯤 지났을 무렵 B는 새로운 데이트 상태가 생겼다고 얘기했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여자 친구가 지었던 것과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놈과 첫 데이트를 하러 가던 날, 나는 집에서 사르트르/보부아르 경전을 읽어 내려가며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상대의 새로운 사랑을 제약하지 말 것.. 상대의 새로운 사랑을 제약하지 말 것.. 상대의 새로운…..’ [사르트르/보부아르 경전] 1. 모든 로맨틱한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2. 상대의 새로운 사랑을 제약하지 말 것 3.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말 것 다른 남자와 첫 데이트를 하고 온 B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꺼낸 탓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들고 있던 우유 컵을 떨어뜨려 와장창 깨뜨리고 말았다. B는 그녀 자신과 나,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애인과 함께 트라이어드 관계로의 발전을 시험해보기 위해 셋이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트라이어드와 같은 좀 더 견고한 관계를 꼭 맺고 싶다는 B의 요청에 식사 자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지나 셋이 함께 만나기로 한 당일, 나는 그놈이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을 하며 B와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레스토랑에 입장해서 주변을 살피는데 B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기에 어떤 놈인지 보기 위해 시선을 향한 순간 나는 선 자리에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저 멀리서 나와 B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A였다. 배신감과 질투, 집착이 흙탕물처럼 뒤섞인 감정의 폭발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내 얼굴을 보고 어디 불편하냐고 묻는 B의 시선을 외면하며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다. 한참이 지나 겨우 주문한 메뉴들이 나오고 외줄타기 같은 식사를 이어나가는 동안 A는 시종일관 웃으며 우리 셋이 트라이어드로 발전할 수 있는 이유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B도 똑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힘껏 쥔 내 주먹을 쓰다듬는다. 그 순간 A가 ‘어때?’ 라며 내 반대쪽 주먹을 잡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A의 면상에 주먹을 갈겨버렸다.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린 B를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레스토랑을 뛰쳐나갔다. 하염없이 뛰기 시작했다.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빌딩으로 올라갔다. 옥상 난간에 발을 올린 순간 건너편 건물의 네온사인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모어 러브‘ 나는 순간의 망설임 없이 난간에서 앞으로 몸을 내던진다. 폴리아모리를 저주하며 난교 축제를 벌이고 있는 지구를 향해 머리부터 빠른 속도로 낙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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