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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연어 Oct 20. 2022

하루를 사는 언어

(50대, 인생을 바꾸는 100일 글쓰기)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하루 종일 무얼' 하는지도 중요하다. 그 일에 온갖 에너지를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아하는 일이든 별로 그렇지 못한 일이든 상관없이 정신과 육체에 관여한다. '주로 하는 일'은 심지어 성향과 정체성을 바꾸기도 한다. 하루 일하는 시간 동안, 나는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제한된 용어를 쓰며 비슷한 결과물을 도출한다. 이 일들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데 어느 시기를 지나면 기계적인 행위와 다르지 않다. 견적 <발주 <납품 <정산 <관리의 무한루프가 돌아간다. 하루 8시간, 내가 보는 세상은 모니터 안에만 존재한다. 오후가 지나면 사물이 될 시간이다. 내 옆에 화분, 그 오른쪽 냉장고, 그 뒤에 테스트용 컴퓨터, 그 맞은편에 나.. 우리는 익숙한 동료이자 사물이다.


주된 일중 하나가 거래처에서 요청한 견적을 주는 일이다. 견적을 줘야 구매가 이루어질 테고 그래야 먹고 산다. 견적서 안에 담긴 활자는 상품을 알리는 부호다. 머리 좋니? 힘은 얼마나 세? 잘살아 못살아? 건강은? 등이 부호 안에 숨어있다. 사람의 인생사가 다르듯이 기계들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얘들도 자기 계발이 가능한데 수량을 늘리거나 줄여서 자가발전을 한다. CPU, 메인보드, 메모리, 파워 등 주요 부품을 교체하면 부귀영화도 보장된다. 잘난 친구들은 귀한 곳에 가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기업의 생산성을 높인다. 오늘도 몸값이 천차만별인 장치들이 시장에 나와서 자신을 알리기에 바쁘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직업병이 생긴다. 토씨 하나 잘못 쓰면 완전 다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초창기 수차례 경험) 보고 또 보면서 스펙이 맞는지 확인한다. 여차하면 마진율에 0 하나를 때 내야 할 수도 있다. 자꾸 들여다보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사람도, 상황도 안이 보이는 듯하다. 궁예의 관심법처럼 사람 마음을 읽는 건 아니라서 그저 '그 상황이 왜 그런지' 빠르게 수긍이 되는 편이다. 가령 개업한 지 삼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가게가 문을 닫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머릿속에 한 번에 입력되는 식이다. 그래서 맥락 없이 거리에 들어선 상점을 보게 되면 왜 저렇게 준비 없이 들어왔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람도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는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이 겪게 되는 '그럴만한 삶의 이유'가 느껴진다. 본질에 가까워지는 훈련을 나도 모르게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순전히 착각이지만-견적서는 핵심만 담아야 된다)


나는 이 비언어적인, 언어를 통해 하루의 일정 시간을 보낸다

지나온 시간, 우리 가정의 생계를 이어왔으니 사냥을 위한 창과 방패는 되는 셈이다


이 특별한 8시간이 지나면 다시 에너지의 흐름을 돌려야 한다. 요즘은 글쓰기를 하는 터라 다소 이질적인 두 가지 사고의 흐름이 이어진다. 한껏 쏟아부어 정신적 진이 풀릴 때쯤 다시 글쓰기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 장소가 때론 지하철이 되기도 하는데 딱히 어디가 되던지 상관은 없다. 그래도 비언어가 언어로 옮겨지는 변압기(트랜스포머)는 필요하다. 첫 문장에 발동이 걸리지 않아 하염없이 모니터만 쳐다보는 그런 변압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때가 되면 완전한 글쓰기 인생을 고대한다.

자판 위에 활자를 퍼즐 하듯 배열하고 싶다. 그땐 변압기도 띠어내고 정격출력으로 달려보고 싶다.


8시간 동안의 나의 언어는

역할을 마치고 퇴근 무렵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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