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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Dec 29. 2019

가임기 여성이라는 무게

10년 만에 구충제를 먹었다. 나는 어릴 때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구충제를 먹었던 옛날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세상이 좋아지기도 했고 그런 것까지 챙겨 먹을 여력이 없었다. 결혼 후에도 구충제란 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 결혼 초반 아는 약사님 약국에 들렸다가 우연히 구충제를 얻게 되었다. 난 뭐든 전문가의 말은 깊이 신뢰한다. ‘약사님이 먹으라고 하셨으니 먹어야지.’ 약봉지를 뜯으려는 순간 깨알같이 적힌 주의사항을 보았다.


어린이나 임산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의사와 상의 후 복용하세요.


나는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었다. 생리를 시작한 모든 여성은 가임 여성이 된다. 게다가 나는 결혼한 여자 아닌가. 임신을 준비하던 터라 결국 구충제를 먹지 않았다. 그렇게 10년간 나는 구충제를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신문에서 현대인들은 초밥이나 회를 자주 먹기 때문에 구충제를 먹어야 한다는 기사를 봤다. 초밥이나 회를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나처럼 골골한 사람에게 약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우선순위다. 나는 약국으로 달려가 구충제를 사 왔다. 먹으면 좋다니까 일단 먹어두자. 그러다가 10년 전쯤 마지막으로 구충제를 먹으려고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결혼한 여성 특히 임신을 준비하는 여성은 약을 먹을 때 늘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배란주기를 확인하고 약을 먹었다. 나처럼 각종 약을 달고 사는 사람, 부모님보다 의사 선생님을 더 자주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 약의 힘으로 버티는 사람에게 내가 가임 여성이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버거웠다.

특히 내 몸은 힘들 때면 면역력이 저하되서인지 몸 곳곳에 염증이 생긴다. 1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 무척 긴장되는 기간이다. 주부습진으로 피부과에서 약을 처방받아먹을 때도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확인한다.


 “저 임신 가능성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임신을 확인하고 복용을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안도한다.

어떤 병원에 가든 나는 약을 처방받을 때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래야 맘이 편안했다. 아마 임신을 준비하는 여성들은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거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에 혹여라도 부담 이 되거나,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공포에 가까웠다.


물론 아주 타고난 건강함으로 약 먹을 일이 전혀 없는 가임여성도 본적 있다. 결혼 후 애 셋을 낳을 때까지 약을 입에도 대본적이 없다는 그분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여성 같아 보였다. 건강한 사람을 많이 부러워하기보다는 저질체력인 내 몸을 탓한 적이 많았는데, 임신을 준비하면서는 약을 먹을 일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가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서 결혼초에 가장 먼저 했던 것 역시 약 구입이었다. 임신을 준비하는 여자는 엽산이라는 걸 먹어야 한단다. 기형아 방지 및 기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형아라는 단어에 다른 건 읽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엽산은 매우 작은 알약인데 그때 산 엽산은 하얀 통에 200알이 들어있었다. 7개월이면 다 먹겠구나. 이걸 다 먹기 전에 임신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약 알 수를 셈해본 기억이 난다.


꾸준히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몇 달이 지나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니면서 결국 엽산을 다 먹지 못했다. 몸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먹자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엽산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엽산은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 당시엔 흔치 않았던 해외직구로 사신 거라며 좋은 엽산 한통을 주셨다. 그 엽산은 몇 개였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때는 아마 결혼 3년 차가 지났던 것 같다. 이미 나는’ 불임’이라는 병증이 적힌 환자카드를 들고 열심히 한의원에 다니고 있었다.


주신 마음을 생각해서 한동안은 먹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역시나 내겐 엽산이 그다지 필요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항산화에 좋다니 먹어보려 했지만, 손이 가질 않았다. 내게 엽산은 임신한 여성이 먹는 약이었다. 임신을 못하고 있는 내게는 언제 그 필요가 생길지  수 없는 약이었다.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한동안은 아예  엽산을 사지도 않았다. 세 번째 엽산은 2년 전쯤 해외직구를 통해 샀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인터넷으로 엽산부터 주문했다. 내게 엽산 구입은 스스로에게 내린 선전포고 같은 일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또 여기저기 몸이 좋지 않았고, 임신보다는 차라리 조금만이라도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갖기 시작했다. 250알짜리 그 엽산 역시 반의 반도 채 먹지 못했다. 엽산을 먹으며 스스로 암시를 걸기도 하고, 그래도 늘 내 몸은 준비되어 있어야지 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무장해보려 했지만, 역시 의지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가임기 여성이다. 폐경이 오기 전까지는 뭐 그렇다니까. 의학적으로야 매우 희박한 확률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가임기 여성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다. 약을 먹을 때마다 엑스레이를 찍을 때마다 핸드폰 스케줄러를 확인한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희망고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어렵기도 하다. 그래도 가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 과정을 멈출 수는 없다. 가능성이 매우 매우 희박하긴 해도 나는 여전히 가임기 여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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