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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Jun 11. 2024

시간을 배려한다는 것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소중하다."


월요일은 늘 바쁘다. 입주민들이 주말 중에 묵혀둔 요구사항을 분출하는 날이니까. 그날 오전도 자리에 앉아있을 틈 없이 동분서주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내가 챙겨준 반찬그릇들을 늘어놓고, 전자레인지에 밥을 데워 먹고 있었다. 반 이상 먹었을 때쯤 세대에서 인터폰이 왔다. 받지 않아도 되는 휴식시간이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직업정신이 발동해서 인터폰을 들었다.


대뜸 "인덕션이 안됩니다. 함 봐주셔야겠는데요." 한다. 나는 정중하게 "제가 지금 식사 중이었는데, 다 먹고 올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했다. 그랬더니 볼륨이 약간 올라간 까칠한 목소리로 "그럼 내가 식사 못하고 있는 건 어떻게 할 겁니까?" 한다. 다르게 표현했지만, '헛소리 말고 당장 올라와서 고쳐놔!'라고 들렸다.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아서, 설명을 하려니까 막무가내다. 잘 모르겠으니까 올라와 보란다.


공구가방 챙겨 들고 올라가 보니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입주할 때 사용법 교육을 건성으로 받은 결과가 나타난 거다. 이중으로 된 전원 장치의 하나를 켜 놓지 않았으니 인덕션이 작동할 리가 있겠는가. 자신도 계면쩍었던지 "불편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한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를 더 요구해서 해결해 주고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밥은 식은 채 밥그릇에 말라붙어가고 있었다. 달아난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반찬그릇을 챙겨 넣고 말았다.


점심시간은 법적으로 보장된 휴식시간이다. 네 시간을 근무하면 삼 십분 이상의 휴식시간을 보장해 주게 되어있으니까, 하루 여덟 시간 근무기준하면 점심시간 한 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을 수 없는 휴식시간이다. 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법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이지만,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생각은 좀 아쉬웠다.  


"바쁠수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라."


아쉬운 일도 있었지만, 바쁜 하루는 나에게 꿀잠을 안겨주었다. 다음 날 여느 때보다 개운한 컨디션으로 일어나 교대를 하고 전철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전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연세 지긋하고 안대로 눈을 한쪽만 가린 할머니가 종이쪽지를 들고 다가왔다. 종이쪽지에는 꾹꾹 눌러쓴 글씨로 병원 가는 방법이 쓰여 있었다. 방금 전철에서 내리기는 했는데, 병원까지 어떻게 가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멀지는 않지만 말로 설명하려니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여기서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택시를 잡기 시작했는데, 잘 잡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을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문자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다가가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멀지 않으니까 같이 걸어서 가시죠." 했다. 병원을 향해 같이 걸어가면서 눈에 안대는 왜 했느냐고 물으니, 벗으면서 보여주는데 멍이 새파랗게 들어있다. 자다 일어나 잠결에 화장실을 가다 뭣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면서 눈 부위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두 번째로 병원에 가는 길이고 처음에는 퉁퉁 부어서 볼만했다고 했다. 병원 입구까지 걸어가면서 할머니의 인생사가 계속되었다.


나이 사십 세에 남편을 신장암으로 떠나보내고, 사십오 년을 혼자 지냈다. 자식도 없었으니 실로 홀로 된 생활을 한 것이다. 부지런히 벌어 이십 오평 아파트도 마련했고 연금도 들어놔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댄스도 배우고 시간만 나면 등산도 많이 해서 지금도 다리가 딴딴하다고 자랑이다. 외롭지 않느냐는 물음에 친정 자매들하고 교류가 많아 문제없고, 쪽지도 육십 지난 막내가 써줬다고 한다. 목소리에 힘이 있고 걷는 모습도 꼿꼿하다. 병원입구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하면서 헤어졌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괴테가 말했다고는 하나 책 제목으로 익숙해진 말이다. 일부 이과들은 속도란 말에 방향 개념이 들어가 있으니, 속도를 속력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본질은 단어 보다도 의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빨리 가는 것에만 매몰되어 방향을 잘 못 잡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방향이라는 것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갈 것인가?'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야간운전할 때, 빨리 가기 위해서는 바로 앞을 비추는 헤트라이트 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멀리 풍요롭게 빛나는 달빛도, 도시를 지나며 볼만한 야경도 볼 수 없다. 속도를 늦추고 고개를 들면 볼 수 있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입장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타인의 시간에 대한 배려는 생각하지 못한다. 빨리 가서 휴식을 취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할머니의 요청은 빨리 떨쳐버려야 하는 짐에 머물렀을 것이다.


나의 길을 빨리만 가려하면 방향을 바꾸기도 멈추기도 어렵다. 속도를 늦추고 이 방향이 맞는지 점검해 보면서 가야 한다. 내 시간만큼, 타인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배려하는 것. 내  시간을 더 갈급한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 아량을 갖는 것. 별게 있겠나. 이런 것들이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잡아 나가는 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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