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다가 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드러내면서, '양심이 있니, 없니'하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나는 양심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의 양이 차이 날 뿐,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양심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양심의 양을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말이 '양심의 수위'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마다 양심의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그 수위에 따라서 항상 흘러넘치는 사람과 메말라 인색한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양심의 그릇은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신념, 인격의 정도, 도덕적 의식에 의해서 채워지기 때문이다.
박노해는 2022년 5월에 '너의 하늘을 보아'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집 이후, 실로 12년 만이었다. 거기에 실린 '수위(水位)를 바라본다'라는 시에 '양심의 수위'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먼저 수위에 대해, '노동산 자락 마을 저수지의 수위가 바닥까지 내려가도, 넘실대도 농부들의 애간장은 녹아내렸지만, 알맞은 수위는 풍요와 감사의 노래가 울리는 오선지였다'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우리 시대 사회상을 꼬집기 위해, '우리들 양심의 수위는 어찌 되었는가.'라고 일갈했다.
시인이 말한 '양심의 수위'는 얼마만큼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나는 양심의 그릇에 흘러넘쳐야 한다는 말일 것이라 생각한다. 노동산 자락 마을 저수지의 수위는 알맞아야 하지만, 양심의 그릇은 항상 흘러넘쳐야 마음이 행위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을 시험받게 되어 몸이 뒤뚱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양심이 흘러넘쳐야 마음의 소리를 따라 빨리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양심은 알고 있거나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높은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양심의 수위에 자신이 없는 내가 양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에 연속된 두 번의 일을 겪으면서 사유를 통해 느낀 점이 많아서이다.
나와 같은 날 근무하는 청소 관리원이 지나가다, "선풍기가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선풍기가 입주민이 기증했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난히 더운 날, 관리원이 분리수거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선한 마음을 가진 입주민이 들고 와서 건네준 선풍기였다. 내가 그 선풍기를 관리원이 분리수거장 안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이 편한 위치에 설치해 주었던 것이다. 역대급으로 무덥고 길었던 올여름, 그 선풍기는 관리원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주는 지원군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즉시 나는 분실된 시간을 추정하여 CCTV 추적 검색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을 특정할 수 없었고 CCTV 공백구역으로 인해 난관은 있었지만, 끈질긴 검색 끝에 범인을 식별할 수 있었다. 범인은 입주민의 지인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다가 떠난 사람이었다. 새벽녘, 분리수거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왔다가 설치된 선풍기를 발견하고, 세 번을 들락거리며 망설이다 들고나갔다. 그리고 주차장의 자신의 차 트렁크에 넣어놓고 숙소로 들어가는 것이 확인되었다. 곧바로 관리실에서 연락이 취해졌고, 분실된 지 십 일이 경과된 후 택배로 보내왔다. 택배 안에는, 쓰지 않는 것으로 알았다는 변명이 포함된 사과문과 돈 만원이 들어있었다. 엄연한 절도 사건이었지만, 선풍기를 돌려받은 것으로 감지덕지하고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덕분에 관리원들은 무더웠던 추석연휴기간 내내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휴일 날, 관리원이 차 한 잔 하자며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어서, 무슨 봉투냐고 물었다. 종이 박스를 버리는 곳에서 주웠는데, 신세계 상품권 만 원짜리 세 장이 들어 있다며 나에게 보여준다. 어차피 버린 것인데 물건 살 때 보태서 쓰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니 대뜸 실수로 버렸다며 찾으러 오면 어쩌냐고 하면서, 한껏 찝찝해하는 눈치다. 나는 액수도 많지 않은데 뭘 그렇게 고민하나 싶어서, "그럼 일주일 정도 가지고 있다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그냥 쓰세요." 했다. 관리원은 일주일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근무 날에 또 관리원이 찾아왔다. 상품권 문제를 자기 아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버지 왜 그걸 가지고 고민해요. 그냥 있던 자리에 두고 잊어버리세요."라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할 때 표정을 보니, 아들의 말대로 따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퇴근할 때 주웠던 위치에 놓고 나갈게요."라고 했다. 퇴근하면서 통로에서 마주친 그의 모습에서 홀가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나에게 이야기할 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마음 정리가 된 듯했다. 상품권의 액수는 적지만, 자기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양심의 울림을 못내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헌법 재판소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 여부를 판결하면서,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명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마음의 소리’이다.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으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숙고할 수 있게 만드는 마지막 거름망이 '마음의 소리'이다. 이 두 가지의 연속된 해프닝을 보면서, 사람마다 양심의 수위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양심의 수위는 지식이 많고 적음, 교육을 많이 받은 정도, 경제적 여유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