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치른 결혼식은 허탈함과 후유증을 낳았다. 아무 연고와 공감이 없었던 주례선생의 지루한 주례사, 일정이 빈 예식장의 불가피한 선택, 급하게 예약하느라 혼잡했던 피로연 자리...., 그나마 많이 참석해 준 동기생들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아버지는 연고가 있는 원주에서 하기를 강하게 원했으나, 연로한 장인이 장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과 내 지인들의 참석 용이성을 고려해서 진해를 밀어붙였다. 결혼식 장소를 진해로 정한 것은 많은 후유증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결정 과정에 아내의 의지가 많이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한 듯, 신혼 초부터 아내에게 살갑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삼십 년도 더 지난 나의 결혼식을 소환한 이유는, 우선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어서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배려와 조율이 된 결정 과정을 거쳐야 했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에 더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젊은이들의 점점 어려워지는 결혼에 이르는 과정, 이에 따라 파생된 결혼율 저하와 출산율 하락 문제가 나의 주요 관심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 영향을 준 이유는, 최근에 참석했던 조카의 결혼식에서 받은 감명 때문이다. 이제까지 참석했던 전형적 결혼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의미는 충분히 살린 결혼식이었다.
이미 친구 아들의 결혼식을 보며 썼던 글이 있으니, 이 글이 결혼식 시리즈 2탄이 되는 셈이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 나는 서울 근교에 있는 주택 정원의 결혼식장에 있었다. 주소를 내비에 찍고 찾아왔지만, 좁은 시골길을 접어들 때는 정말 수없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이 될 정도로 좁디좁은 길이었다. 내비에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을 때, 걸어가고 있는 젊은 여성을 지나쳤다. 시골길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어, 행선지를 물어보니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해서 같이 타고 왔다. 도착한 곳은 비슷한 주택 여러 채가 정감 있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협조해 놓은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신랑 신부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곳에는 언젠가 미국 드라마에서 본 듯한 결혼식장이 꾸며져 있었다.
신랑의 부모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정원이 아기자기한 결혼식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식장으로 활용하려 두 달 전부터 손수 수목과 화단 정리를 했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장소였지만, 꽃이 뿌려진 중앙 이동로 양측으로 대형 원형 파라솔 테이블이 두 개씩 놓여 있었다. 테라스는 음식을 준비하고 진행요원이 대기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하객을 파라솔 테이블에 수용 가능한 인원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태우고 왔던 여성은, 신부인 조카의 친구하객으로 초청된 두 명중 한 명이었다. 양가 가족들도 그야말로 최소로 초청되었고, 그냥 지인들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실 아내는 신부의 이모여도 초청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가 피로연 때 흥을 돋우는 가수로 지목되면서 동반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결혼식의 진행도 의미 있는 절차 만으로 단순화했다. 신랑 신부가 돌아가며 낭독한 결혼생활 약속, 아버지들의 당부 그리고 화동에 의한 예물 전달식이 전부였다. 양가에서 초청된 몇 명 되지 않는 하객들이 예식장의 수많은 하객들과 같은 축하와 박수 효과를 연출하느라 다소 부담스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식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는 시간, 드디어 나를 하객으로 초청해 준 이유를 증명할 차례가 돌아왔다. 분위기도 띄우고 결혼식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준비해 간 두 곡을 하객들의 성원 속에서 불렀다. 코스로 제공되는 식사에 열중하느라 앙코르가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홀가분한 듯 웃음을 머금고 환송해 준 신랑신부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기를 기원했다.
내가 조카의 결혼식에서 특별히 주목한 것은, 스몰웨딩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스몰웨딩은 '예식장이 아닌 작은 장소에서 적은 수의 하객을 모시고 치러지는 결혼식'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장소와 하객의 기준만 충족하면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면, 결코 스몰웨딩이라 칭할 수 없다. 스몰웨딩의 시초를 이효리와 이상순의 결혼식이라고 보는데, 장소와 하객의 기준은 충족되었지만 참석한 사람들의 비행기 값에 숙소까지 잡아주었던 비용을 고려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몰웨딩은 아닌 것이다. 조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몰웨딩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의미를 높이 사는 것이다.
동기생 자녀 결혼식 때, 군 복지시설의 결혼식장 사용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군 출신인 만큼 군 복지시설을 이용한다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 만으로도 이용할 수 있어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선호하는 장소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젊은이들에게는 기피장소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선호하는 장소는 강남의 예식장이었다. 나는 이런 풍조가 일생에 한 번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남들과 비교우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스몰웨딩을 미리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조카부부는 젊은이들임에도 남 나른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진정한 스몰웨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신부의 어머니인 처형의 말에서 읽을 수 있었다. 결혼 준비과정에서 신경을 쓸 게 없었다고 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당연히 경제적 부담이지만, 조카가 줄이고 줄이고 줄였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결혼식에 참석해서 낸 부조금의 회수에 큰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혼식장에 맞는 적은 하객의 수를 고집한 것은 대단한 결심이었다. 이 모든 준비 과정이 신랑 신부는 물론, 양가 부모의 동의 하에 같이 준비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배려와 조율 없이 시간에 쫓겨 멋없이 치른 나의 결혼식이 한없이 초라해지면서, '다시 한번'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결혼식을 높은 산으로 만들어 넘고 나면 기진맥진 쓰러지기보다, 낮은 산으로 만들어 넘고 더 오래 멀리 갈 수 있는 사회 풍조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