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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r 19. 2024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보라

여덟 시 이십오 분!

근무를 인계받고 첫 순찰에 나서는 시간이다. 이동 중에 통로를 청소하고 있는 미화여사들과 아침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계단으로 가서 옥상까지 직행한다. 계단 오르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이젠 보약을 한 첩 먹는다는 생각으로 오른다. 덕분에 묵직했던 배둘레햄이 그야말로 싹 없어졌다. 옥상에 올라가면 좋은 기분으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사색을 한다. 그리고는 계단을 통해서 구석구석을 확인하면서 지하 5층까지 내려간다. 지하 5층에는 전기실, 펌프실, 지열실 등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하는 장비들이 많이 있다. 여기까지 돌고나면, 근무일마다 하루 네 번씩 어김없이 하고 있는 루틴이 끝난다.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한 휴일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순찰을 돌고 있었다. 5층 엘리베이터실 앞쪽을 지나는데, 음식물이 바닥에 쏟아져 있고 벽에도 튀어올라 볼만했다. 평일 같으면 미화여사에게 알려만 주면 되는데, 휴일이라 방법이 없었다. 청소도구를 가져와 혼자서 쓸고 닦고 난리를 쳐야 했다. 입주민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라,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다시 순찰 돌며 내려온 세탁실은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카트가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바닥에는 수많은 건조기 시트지와 먼지 덩어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별수 없이 손 걷어붙이고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은 상한 마음으로 내려온 지하 주차장에서는 주차 공간에 버리고 간 테이크아웃 컵들과 담배꽁초, 주차 공간 두 개를 잡아먹고 주차된 차를 보면서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한꺼번에 인내력을 테스트받는 날을 없었다. 씩씩거리며 방재실로 올라와 CCTV를 확인했다. 다른 입주민에게 불편함과 피해 준 사례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 실수로 그릇을 떨어트렸는데, 빈 그릇만 들고 사라졌다. 그곳을 지나갈 수많은 입주민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이다. 세탁실에서는 자신의 빨래만 털어 담아가기 바빴다. 털면서 바닥에 흩어지는 시트지와 먼지덩어리는 무시한 채. 이후에 이용할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길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럴 때 이용하라고 쓰레기 통을 비치해 놨는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테이크 아웃해서 차에서 먹은 음료수 컵은 으레 주차장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주차장에서 흡연하면 더 맛있기라고 한가? 청소하는 사람이 치우기 전까지 눈살 찌푸릴 다른 입주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차 공간이 여유 있다는 것을 꼭 두 칸 주차로 시전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하여간 끝까지 추적해서 또박또박 기록해 두었다.    


나름 '깨진 유리창 법칙'의 실험장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심히 허탈했다. 그냥 연초에 많은 세대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흐트러졌을 것이라고 자위를 하면서 지나가려 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정말 궁금했다. 머릿속에 양심, 도덕, 윤리, 이런 말들이 맴돌았다. 차제에 이런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보고, 원인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들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적 문제로 다뤄진다면,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 상호관계에서 준수되어야 할 행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양심'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도덕적 가치관과 윤리적 판단을 기반으로 한 내면적인 의식이나 선의의 의지를 말한다. 벌써 '양심'의 의미와 관련된 말 자체에 '도덕'과 '윤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단어들은 서로 땔레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의미상으로도 '도덕'은 '사회구성원들의 양심', '윤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라고 되어 있었다. 결국, 모두가 양심적으로 행동하면 이런 일들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심의 기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함께 알고 있는 옳다고 생각하는 공통적인 기준 만 지켜 준다면 타인의 기분을 망칠 일이 없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신의학과 의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 사람 25명 중 1명은 공감능력이 아예 제로인 '양심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양심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경이롭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공감능력'이다. 공감능력은 '타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고와 기분에 적절한 감정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 이렇듯 공감에는 두 단계가 있다. 바로 인식과 반응이다. 인식은 했지만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공감하지 않는 것이 되므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줄 것 같다는 인식, 그러니까 그러지 않도록 행동으로 옮겨야 겠다는 반응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단계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양심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버린다.


나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준 사람들이 공감능력의 첫 단계인 '인식'마저 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단계인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일 것이라고 본다. 즉, 일말의 양심이 있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것과 같다는 틀 속에 있는 것이다. 십중팔구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유형으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많다. 우리 주변에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앞으로 이런 일로 인해서 나의 기분까지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4%의 '양심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하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해주고 싶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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