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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Sep 21. 2022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_3

거리를 걷는 이들을 위한 핑계

명절은 언제나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어째서 즐거운 것들은 짧게 끝나버리는 걸까요? 크로플은 단 몇 입에 사라지고, 육전은 몇 번 홀랑홀랑 빼먹으면 남은 것은 더덕구이! 추석이 다 가기 전에 나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어 초밥을 시켰습니다. 초밥을 먹으면서 일본으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초밥에 밥이 이렇게 적게 들어있을까요? 언젠가 꼭 일본에 가서 정말 이렇게 초밥에 밥이 적은 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초밥은 핑계입니다. 그냥 한번 일본 여행가보고 싶어요. 명절 동안 돈만 많으면 일본으로 당장 비행기 타고 가서 온천욕이라도 하고 올 텐데!


신이 인생에 밸런스를 맞추려고 이리 즐거운 것들을 조금씩 넣어주셨다면 부디 조금만 더 늘려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수박바가 맛있는 건 빨간 수박 아래 있는 수박 껍질이고, 건빵이 맛있는 건 별사탕 때문! 게임 던전을 열심히 도는 이유는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레어템이며 내가 거리를 휘적휘적 걷는 이유는 어딘가 새롭게 만날 이상한 가게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명절이 끝난 이 시점에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이곳저곳 거리를 쏘 다니고 있습니다. 이 거리 어딘가에 내 마음을 위로해 줄 무언가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너무나도 막연한 기대감으로 말입니다.


오래된 길을 걷는 걸 좋아합니다. 선화동, 소제동이 그렇습니다. 특히 무너져 내리는 집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막 그렇다고 찾아다닌다기 보단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낡은 집이 주는 스토리가 재밌습니다. 과연 누가 살았고 어떤 삶이 펼쳐졌을지 주변에 널브러진 단서들을 찾아보면서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선화동, 소제동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마을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일본인들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옛날 대전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겐 대전이 고향입니다. 해방 이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아마 쉽게 다시 고향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이곳 어딘가 추억의 파편으로 남아 풍화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 저는 더욱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어쩌면 이곳에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걷고 싶은 거리는 30~40개 정도 가게가 밀집된 거리라고 유현준 교수님이 말했었습니다. 거리는 TV와 같아서 다양한 볼거리를 보여 줄 수 있는 거리가 사람들이 찾는 거리라고 했습니다. 여행지에선 아무래도 그런 거리를 걷고 싶습니다. 낯선 곳에선 어떻게든 이 순간을 기억할만한 무언가를 찾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익숙한 이 거리를 저는 무엇을 기대하며 걷고 있는 걸까요? 매번 봤던 거리지만 걸을 때마다 신나는 이 마음은 어째서인지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낡은 건물을 볼 때 묘한 긴장감을 주는 게 좋다는 것만 알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는 건 핑계를 만드는 거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고 싶은 것에 적당한 이유를 붙이는 것이 어른들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너 뭐하니?”라고 물었을 때, “그냥 있어요”하면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시간은 돈이라고 하는데 돈을 벌어서 또 시간을 삽니다. 피시방에선 천 원에 한 시간을 살 수 있고, 클라이밍 장에선 하루를 이만 삼천 원에 살 수 있습니다. 아아. 자본주의에서 가장 좋은 건 공짜란 말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그러니 무언가 하려면 반드시 핑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헛헛한 마음 달래려 걷는 이 마음은, 내가 거리를 걷는 이유는 또 다른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게 사람이니까요. 낡은 건물은 매번 모습을 바꾸기에(대부분은 무너지기에)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근엔 벽지 속에 감춰있던 종이를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예전엔 책 종이를 찢어 벽지를 붙였다는 말을 전설처럼 들었는데 정말 그랬더라고요. 거리에 있는 가게는 매번 같아도 그 가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번 변합니다. 생명의 약동! 결국 사람이 설레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머문 흔적이고, 그 흔적에서 피어나는 설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달도 기우는 날입니다. 애석하지만 다음 명절을 기다리면서 거리 걷는 것을 멈춰보려 합니다. 아무래도 다음엔 명절 다음에 연차를 붙여 써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일하는 거 빼고 다 즐거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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