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지 않는 기준이 사람을 오래 붙잡는다

by Poroom

사람은 생각보다 기준 자체를 잘 의심하지 않는다. 선택은 계속 바꾸면서도, 그 선택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래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먼저 드는 생각은 대개 비슷하다. 내가 부족한 건 아닐까, 내가 더 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기준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은 가장 늦게 온다.


이상한 일이다. 상황은 분명 달라졌는데, 기준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더 이상 맞지 않는 방식을 계속 적용하면서도, 문제를 기준에서 찾기보다 내 태도에서 먼저 찾는다. 그만큼 기준은 쉽게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준은 원래부터 배경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너무 자연스럽게 익혀온 것일수록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전의 나도 비슷했다. 무언가 잘 안 되면 방법을 바꾸고, 순서를 조정하고, 더 애써보는 쪽으로 먼저 갔다. 그게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비슷한 지점에서 계속 막히고, 내가 쓰는 에너지만 커질수록 이상한 감각이 남았다. 이게 정말 일이 어려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쓰고 있는 기준이 애초에 맞지 않는 건지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게 있었다. 나는 상황을 다시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같은 기준으로 상황만 계속 다시 해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끝까지 가야 한다는 기준, 버티는 선택이 더 책임감 있어 보인다는 기준, 멈추는 건 위험하다는 기준이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니, 결론도 늘 비슷한 쪽으로 흘렀다.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선택지만 바뀌어도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왜 사람은 틀린 기준을 바로 의심하지 못할까. 기준은 대개 아주 일찍 들어와서, 오랫동안 반복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중간에 포기하면 안 되고, 버티는 사람이 결국 남는다는 식의 말들은 짧고 강하다. 그런 문장은 삶의 다양한 상황을 설명할 만큼 정교하지 않지만, 대신 너무 쉽게 기억된다. 그래서 실제 상황을 판단할 때도 먼저 작동한다.


또 하나는 기준을 의심하는 일이 생각보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기준을 바꾼다는 건 단순히 의견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맞다고 믿어온 방식이 더 이상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선택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왜 그때 그렇게 오래 버텼는지, 왜 그 방향을 맞다고 믿었는지까지 함께 흔들린다. 그래서 사람은 기준이 틀렸다는 결론보다, 내가 조금 더 해보면 된다는 결론을 먼저 선택한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자주 나온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문제가 생기는데도 사람을 더 갈아 넣거나, 보고 체계를 조금 손보거나, 표현만 바꾸는 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구조를 건드리기보다 운영으로 버티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구조를 바꾸려면 기준부터 다시 봐야 하고, 그 과정은 늘 번거롭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서 벌어지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오래 그랬다. 내가 이상한 건지, 내가 더 버텨야 하는 건지, 아직 확신이 부족한 건지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더 늦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충분히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속 같은 기준을 당연하게 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 구조 안에서는 사람도 스스로를 계속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기준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강하다. 보이는 문제는 고치기 쉽지만, 보이지 않는 기준은 오랫동안 남는다. 한 번 익숙해진 기준은 판단의 출발점이 되고, 출발점이 고정되면 사람은 멀리 돌아가면서도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틀린 기준을 의심하지 못하는 건 개인의 둔함이라기보다, 기준이 배경으로 숨어 작동하는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이번 일을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늦게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이미 여러 번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감각보다 오래된 기준을 더 믿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방향을 바꾸는 일은 선택을 바꾸는 일만이 아니라, 선택을 판단하던 기준 자체를 다시 보는 일이라는 걸 조금 늦게 알게 됐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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