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다. 백과사전을 들춰보는 걸 좋아했고, 뭔가 하나 궁금해지면 질문을 붙들고 오래 가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바로 물어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있어서 정말 친한 사람에게만 물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혼자 파고드는 쪽에 가까웠다.
책도 좋아했다. 한동안은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읽었고, 그다음에는 애니메이션 비디오에 빠져 지냈다. 조금 더 커서는 만화책에 깊이 빠져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건 늘 비슷했다. 이야기 자체도 좋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세계와 사람의 방식이 궁금했다. 왜 저 인물은 저렇게 행동하는지, 저 장면은 왜 저 순서로 설계됐는지, 사람들은 왜 어떤 흐름에서는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어떤 흐름에서는 멈추는지 자꾸 보게 됐다.
지금은 그 관심이 사람과 도시로 옮겨왔다.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어떤 표정과 말투와 습관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지, 도시는 왜 그런 분위기를 갖게 되는지 자꾸 보게 된다. 궁금한 건 여전히 계속 생긴다.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걸 궁금해하지 않는지까지 궁금해하는 사람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관심과 질문들은 대체로 반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일기나 메모를 보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고, 보통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설명을 자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대화라기보다, 일반적인 방식 안으로 다시 넣으려는 교정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보다, 왜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지가 더 먼저 지적되곤 했다.
그 일이 반복되면서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설명의 대상이 됐다.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을 하는 방식이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을 한 번 검열하게 된다. 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이 순서로 말하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내가 보는 방식이 지나치게 다른 건 아닌지 먼저 계산하게 된다.
한동안은 그 과정이 아주 자연스러운 줄 알았다. 내 방식이 특이하니까 내가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모나 일기 자체를 점점 멀리하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내 생각을 적어두는 일이 정리나 기록이라기보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되묻는 장면으로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적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지금 돌아보면 문제는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방식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구조 안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직과 관계는 효율적으로 소통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미 익숙한 순서로 설명하고, 이미 받아들여진 표현으로 말하고,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훨씬 덜 피곤하다.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교정의 대상이 된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표현을 바꿔야 하고, 질문의 순서를 조정해야 하고,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한 번 더 정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과정 없이 바로 말하면 뜻밖의 오해나 해프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소통은 늘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동시에, 그 질문이 너무 낯설지 않게 보이도록 계속 포장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여전히 궁금하면 물어보고, 여전히 남들이 넘기는 질문에 한 번 더 걸린다. 다만 예전보다 하나는 분명해졌다.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다름이 문제처럼 취급되던 건 내 성향 때문만이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더 편하게 여기는 구조의 영향도 컸다.
결국 생각 방식이 교정의 대상이 되는 순간은, 그 방식이 틀려서가 아니라 다수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문제는 다른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바로 불편함으로 번역해버리는 구조다. 그걸 늦게 알게 되면서, 나는 내 질문을 고쳐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내 질문이 왜 자꾸 교정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다시 보게 됐다.